혜 학 <울산교구종무원장 • 망해사 주지>

▲ 혜학스님.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맞아 습관처럼 희망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지난 시간에 부족함을 느꼈다는 증거이리라. 돌이켜보면 지난 한해도 그 어느 해 못지않은 다난사(多難事)의 연속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국내적으로도 그러했다.

최근 한 야당의 이름이 된 ‘더불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인간에게 ‘더불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보다. 결국 세상의 모든 갈등은 더불어 살지 못하므로 생긴 것들 아니던가. 인종의 편 가르기, 언어의 편 가르기, 지역의 편 가르기, 인간은 편 가르기 하나만은 잘도 한다.
내 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그에 대한 처사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윤회세계를 나타내는 육도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라계, 아귀계도 딴 세상이 아니다. 편 가르기 하는 바로 그곳이다. <법화경> ‘방편품’에 중생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사견에 깊이 빠져 고로써 고를 버리려 한다’라 되어 있으니 인간은 매사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두느니 악수를 두어 더욱 어려운 일을 만난다는 것이다. 꼭 지금의 세상을 빗대어 하신 말씀 같으나 기실 중생 세계는 늘 그래왔다.

해가 바뀌기 이틀 전 경주 남산의 열암곡을 찾았다. 거기에는 1979년에 이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도 있지만 2007년 새로이 발견된 불상이 한분 더 있다. 정식 명칭은 열암곡 마애불, 놀라운 것은 발견될 당시에 이미 넘어진 상태였는데 오랜 세월 사람의 눈의 띄지 않았던 것도 그렇거니와 정면으로, 그것도 석박 위에 넘어졌으면서도 부처님의 상호가 완전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기적의 5cm라고나 할까, 만약 5cm만 더 넘어졌더라면 엄청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마 그 불상의 상호는 완전히 뭉개져 사라지고 없을 것이었다.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이 그 수많은 세월동안 온전히 본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서 있지 않고 넘어졌던 덕분이었다. 1천 3백년의 세월동안, 역사에 이름이 남는 전란과 함께 폐불, 파불의 파도도 이 땅을 소용돌이쳤다. 그런데도 이 마애불은 조성당시의 모습으로 다시 발견된 것이다. 불상이 넘어진 이유가 지진이었던, 폭우로 인한 산사태였던 오늘 덕스러운 그 모습을 그대로 대할 수 있음에 다만 감격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옆에 위치한 석불좌상이나 여타 남산에서 친견할 수 있는 불상들이 모두 인고의 세월을 어깨에 그대로 드리우고 있음에 대해서는 역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열암곡 마애불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날 친견한 마애불의 상호가 너무나 거룩해서이다. 사람이 새긴 돌조각이 단지 옆모습이 보일 뿐인데 저렇게 고울 수 있을까 탄복하였다. 그것은 그대로 내가 평소 마음에 그리는 부처님의 상호였고 어떻게 보면 참다운 불제자가 닮아야 할 상호이기도 하였다. 문득 아 저래야 하는데 하는 자괴심이 든 것이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크게 덮어 놓은 천막 틈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오래 바라보았다. 자연 나 자신과 우리 승가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 종단이 겪는 어려움의 연원이 어디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결국 우리가 우리 얼굴 간수를 잘 못한데서 온 듯하다.

십여 년 전 지방의 종무원장직을 맡으며 발걸음이 시작된 총무원에서 오늘 동지로 보였던 사람들이 다음날 적이 되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분들의 얼굴은 불제자답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겉으로 짓는 미소 뒤에 숨었던 그분들의 본래 얼굴이 급기야 어느 날의 종회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서슬 뒤에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라도 있는가 하는 의구심에 감히 발언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내가 알던 그분들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다.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 몰라도 직위가 주는 권위에 스스로 도취된 모습이랄까 당사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종단과 종도를 생각했다면 정말 그럴 일이 아니었다.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이 왜 없을까. 양보란 말은 우리와 상관없는 어디 먼 나라 말인가? 그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

종단이 여법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신진은 잘 자라고 있고 사회적으로 종교단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면 때로 발전적 사안에 대하여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것도 미덕으로 보아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종단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해를 넘기는 소요의 와중에 부채 문제는 아예 거론도 안 되는 것을 보고 지방의 종도들이 ‘종단 빚 걱정은 우리만 하고 있다’는 자조의 소리를 내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소중한 인연들인가? 같은 시대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우선 보통 인연이 아니고, 전세의 복(福)으로 부처님 인연을 만나 불제자가 되었으니 또한 고마운 일이고 나아가 한 종단의 일원으로 맺어졌다는 것은 육신의 형제보다 어쩌면 더 깊은 인연들 아닌가. 납의를 입은 불제자가 아니더라도 성냥불 한 개비 타는 순간처럼 짧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며 그 불빛에 상대의 얼굴이 보이면 정을 주고 반기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왜 저주하고 악담을 퍼붓는가? 참으로 어리석다.

종단에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동안 교계에 있어서 종단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였다. 심지어 일반 매스컴에까지 오르내린 분란의 실상은 불교계 전체의 체면도 깎아내리고 말았다.
이 책임은 분란의 당사자들이 반드시 져야한다. 우선 그분들이 스스로 자숙해서 더 이상 종단 운영의 전면에 감히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이고, 새로 구성된 종회는 그 일을 종법에 따라 냉정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미 깎여버린 체면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할 것도 없다. 우리가 못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미래이지 않은가? 우선 힘과 지혜를 모아 빚부터 갚자. 부채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위상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빚 투성이로 소문난 집안을 누가 존중하고 대접해 줄 것인가?

종단에 부채 문제만 시급한 게 아니다. 후진 양성이 큰일이다. 우리 종단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우수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된 이유를 논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나 우선 종도의 자제에 대한 교육에도 소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심각하다.

태고종의 최대강점은 종도자제의 출가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종도 본인이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면 자제에게 기꺼이 그 길을 권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돌아보아야 한다. 간혹 바람직한 케이스가 없지는 않으나 너무 한정된 소수이다. 결국 종도의 자제에 대해서는 종단에서 관심을 가지고 육성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우리 종단과 누구나 아는 타 종단의 젊은 학인에 대한 배려를 비교해 본 적이 있다. 그 종단은 종단장학금이라 하여 국내외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적지 않은 금액의 장학금을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또 명망이 있는 스님들이 일본에 오면 일정에 몇 시간이라도 내어, 출 재가를 불문하고 불교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적은 돈이나마 쥐어주고 간다. 지금껏 우리 종단의 어른이 누가 그런 흉내라도 내었을까? 벌써 옛날이야기이고 내가 일일이 모를 수는 있지만 그때 타 종단의 큰스님에게서 받은 돈 1만 엔에 대한 감회가 새로워서다. 이런 중심에서 정말 필요한 일에 앞장서야 할 곳이 총무원이다.

앞으로 총무원장은 신진을 키우는데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모범을 보일 사람이 해야 한다. 그리고 종도들을 독려해서 종단차원에서 새사람을 키워야 한다. 종단에서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 어디에서건 공부하고 있는 종도들에게 장학금이라도 마련해 주는 것이 먼저다. 그것 하나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울산에 ‘관서정’이란 정자가 있다. ‘관서(觀西)’가 아니고 ‘관서(觀逝)’다. 이는 논어에서 공자가 강물을 보며 말한 ‘가는 것은 이와 같아서 낮 밤을 쉬지 않는다’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개울에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동시에 세월의 흐름을 지켜본다는 뜻이다. 세월은 강물과 같이 거슬러 가지 않는다. 그리고 쉼이 없다. 옛날 선비들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세월이 쉬이 감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을 다스렸다.
오늘 우리들의 시간도 멈추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일개인이 아닌 종단의 시간은 그 무게가 더하다. 정말 중요한 일들을 제쳐둔 채 벌이는 편 가르기는 이제 그만두자. 할일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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