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조 전국신도회장

총무원장님이 현관 밖으로 내팽겨 쳐지고, 함께 계시던 스님들과 여직원들이 폭행당하는 모습이 CCTV 화면에 보였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팽겨 쳐지는 저분이 과연 총무원장 선거인단과 중앙종회의원들에 의해 70%의 지지를 받아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분이 맞는가?

얼마 전 보육교사의 유아 폭행으로 온 나라가 폭력에 대해 분노를 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터에서도 어린아이와 여성에게는 그럴 수 없는데, 하물며 태고종의 근본인 총무원에서 스님들에 의한 폭행과 폭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문제를 법과 절차,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않고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단 말인가? 어찌 오백만 태고종도들에게 고개를 들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불제자임을 말할 수 있겠는가?

 
“왜 스님은 삭발을 하셨습니까?”

삭발은 단순한 통과의례나 관습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세속에서 벗어나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본받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약속이자 징표다.

그런데 작금의 태고종 스님들의 모습에선 부처님께 귀의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자신의 실리와 명분만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스님은 잿빛 승복을 입고 계신가요?”

승복의 잿빛은 걸사의 정신으로 청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출가 승려들의 각오를 투영한다. 즉,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색,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숨겨놓고 있는 색, 그것은 흑과 백을 초월한 조화의 색이자 원융의 색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태고종 스님들은 승복의 잿빛색이 의미하는 청빈한 삶,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삶, 흑과 백을 초월한 조화의 색의 의미로 생활하고 있는가? 승복을 입고 어떻게 폭행을 할 수 있으며, 타협도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태고종 스님들은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잿빛 승복을 입고 있는가?

 
“왜 스님들은 수행을 하면서 목탁을 치십니까?”

목탁을 치는 이유는 목어(木魚)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목탁을 치면서 더욱 열심히 정진하고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짐승, 미물을 포함)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짐승이 알아듣는 소리로 중생을 제도할 필요가 있기에 목탁을 친다.

그런데 작금의 태고종 스님들은 무엇을 구제하기 위해 목탁을 치는가? 혹시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목어를 치지는 않는가?

 
“왜 스님들은 항상 염주를 돌리고 계시는지요?”

염주의 의미는 수주(數珠)라고 하며, 염불의 횟수를 기억하는 구슬이라는 뜻이다. 염주 한 알을 굴릴 때마다 번뇌가 끊어짐을 상징하므로 일념으로 염주를 돌림에 따라 부처님 광명이 자신에게 충만해지고 죄업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태고종 스님들은 염주를 돌리면서 죄업이 소멸되고, 번뇌가 소멸되며 안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과 분파만을 조성하지는 않는지 염려스럽다.

세상의 모든 일, 모든 조직에는 옳고 그른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발생 할 때마다 싸우고 폭행하지는 않는다. 지식이 모자라고 경륜이 없어서 싸우는가? 현재 종단 문제의 중심에는 훌륭하신 스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 타협하지 못하고, 양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방을 인정하지도 못한 채 종단보다 나를 더 먼저 생각해 결국 현재의 상황까지 오게 되지는 않았는가.

이제 존경하는 태고종 스님들 모두 삭발한 이유, 승복을 입고 있는 이유, 목탁을 치는 이유, 염주를 굴리는 이유를 생각하고 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닌 본연의 위치로 겸허하게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나보다는 우리 태고종의 미래를 위해 모든 사심을 내려놓고 오백만 종도가 화합 단결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함으로써 온 국민과 불자들께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스님’들로 되돌아가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전국신도회장 백우 정 경 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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