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 암<종단 교육위원회 위원장>
‘복(福)’은 어떤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복된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누가 복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구걸하듯이 빌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복은 스스로 짓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돌보면서 마침내 수확을 얻듯이 복은 ‘앞선 삶’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추구하는 복된 삶이란 건강하고 부귀를 누리며 명예가 높아지는 등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삶이며 내가 성취하고 싶은 희망사항일 뿐 자아의 삶에서 체험되는 현실적 사태는 아니다. 복된 삶이란 내가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곧 자기 삶의 경험적 주체가 되어 행복을 개척하고 그 기쁨을 맛보며 그 가치를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각자가 독자적으로 자기의 삶을 경험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개별적 존재이지만 모두가 자기 아닌 타자(他 者)들에게 의존하여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대자연 전체가 내 삶의 조건이 되어있는 것이다. 좁게는 내가 감각적 접촉을 하고 있는 이 세계와, 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지상에서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시시각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절망 속에서 선택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선택의 포기 쪽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단연 자기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근거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주체(主體)이며, 삶이란 자기 자신의 체험 속에서 인식되는 자기의 삶이다. 인간은 판단과 선택의 주체로서 모두가 개별적 존재이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의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1)사고하고 (2)말하며 (3)행동한다 는 것이다.
일부의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동물도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말이 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자각이나 자기반성의 능력이 없고 어떤 신호에 따라 반응하지만 그것은 생존의 본능적 욕구에 따르는 조건반사일 뿐 주체로서의 의사교환은 아니다. 사고와 언어 그리고 행동은 오직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다. 인간은 오직 이 세 가지 기능에 의존해서만 주체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그것은 곧 세계와의 관계를 선택하는 일이다. 더욱 자세히 말하면 인간은 신구의(身口意)를 통해서만 세계와 접촉할 수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말을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세계와의 관계가 형성되며 복을 짓기도 하고 반대로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인간을 삼현금(三絃琴)이라는 악기에 비유하고 싶다.
인간은 신구의(身口意)라는 세 개의 현(絃)이 달려 소리를 내는 삼현금이라는 ‘악기’다. 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곱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감탄의 박수갈채를 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듣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렇게나 연주하여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날 뿐만 아니라 얼굴을 찌푸리고 집어치우라고 욕설을 퍼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세 줄이 달린 이 삼현금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복을 짓기도 하고, 복주머니를 찢어버리기도 한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불자들은 자아의 위상과 책임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즉 자기 인생과 자기 운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자기의 인생에 대하여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우리들의 삶이 위치해 있는 상황은 다양하며 우리가 인연을 맺고 있는 세상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해야 할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제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사태에 대하여 다정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신구의로 이루어진 이 ‘삼현금’을 아름답게 연주해 자기 자신을 행복의 연주자로 만들어야 한다.
참으로 복을 짓는 일 가운데서 가장 알기 쉽지만 그 실천이 어려운 것은 부처님을 잘 모시는 일이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수행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하여 수행하는가? 궁극적으로는 중생의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 이르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타의 모습이 인격으로 실현될 때 복덕과 지혜가 구족된 모습으로 구현된다.
그런데 우리가 달성하려는 그 부처님은 누구인가? 부처님 말씀에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다. 나를 관통하고 있는 이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삶 속에 내가 모시고 있는 이 부처님을 무지와 탐욕 속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복덕과 지혜가 구족된 부처님의 본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수행의 참된 모습이다.
이 세상은 인연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의 조건이 되어 있는 타자를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인연의 도리를 부정하는 세 가지의 독소가 있다. 그 세 가지의 독소가 탐(貪)진(瞋)치(癡)이다. 마음을 탐욕 속에 빠트리면 우리의 마음은 결핍 속에서 허덕이게 된다. 탐욕은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충족을 모르는 가난뱅이로 결핍을 느낀다. 그는 언제나 남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남으로부터 배척을 당한다. 그의 삶은 타자로부터 단절되어 고독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는 화내는 일이다. 흔히 중생들은 자신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거나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화를 낸다. 자기의 마음을 불구덩이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모시는 부처님을 평화롭게 모시지 못하고 충돌과 불안 속에서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끝으로 어리석음이라는 무지의 독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지는 교육을 못 받았거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인연의 도리와 인과(因果)를 모르고 처신하는 고집쟁이를 말한다. 아무와도 대화가 안 되며 언어의 세계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독소를 자각해 경계심을 가지고 인연의 세계에 동참한다면 필연적으로 복덕(福德)이 구족될 것이고 내 삶의 조건이 되어있는 많은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실천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얼굴에는 부처님의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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