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보살불교의 서원을 진일보시키는 동력이 충만하기를”

기본적으로 불교계의 잠재력은 불교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과 역량의 총화이다. 다시 말하면, 태고종도 개개인이 대외적으로 얼마나 기부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에 따라서 태고종단의 사회적 역량과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 개개인은 보시나 봉사활동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혹시 우리 종단이나 우리 절이 개신교회나 가톨릭성당보다 사회적으로 뭔가를 더 잘 해주기를 바란다면, 불합리한 기대가 아닐 수 없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이 무렵 흔히 우리가 주고받는 인사말인데 본래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이치로 보면 무엇이 ‘옛 것’이고 무엇이 ‘새 것’인가. 서기(西紀) 2014년, 2015년 등으로 시간의 마디를 정하는 것은 인간사 편의를 위함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새날의 희망과 포부를 말하고자 하면 지금까지의 작업(作業)을 바로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내일을 알고자 하면 오늘의 업(業)을 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배운 바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한국불교 태고종은 이념적으로 ‘진보종단’을 자처하고 ‘출가수행을 근본으로 하되 출가와 재가가 다르지 않다고 보며, 사회 속에 뛰어들어 중생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중생구원의 보살불교’를 실천하는 ‘대승교화 종단’이라고 한다. <금강경>과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며 계율에 있어서는 <범망경>의 대승보살계를 중심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특히 ‘교임(敎任)’ 제도를 두고 재가교역자, 전법사를 인정하고 있다.

이제 오는 해를 위하여 지나간 해를 돌아보건대, 한국불교태고종은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에 맞도록 올바른 작업(作業)을 하였는가. 개인차원에서 볼 때, 태고종 종도로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필요한 점검지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송구영신이라면서 습관적으로 반성하고 무책임하게 새로운 포부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설계할 일인 것이다.
앞서 인용한 한국불교 태고종의 사명 가운데 ‘사회 속에서 중생과 고통을 나누고 중생구원을 하는 보살불교’라는 대목이 있다. 사회적으로 이웃의 고통을 함께 지는 것이야말로 태고종도에게 당연한 책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사에서 연말정산을 하는 것처럼, 이 시기의 종도들에게는 지난 해 이웃의 고통을 얼마나 어떻게 나눌 수 있었는지 돌아보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온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종도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한 사건이나, 군(軍) 선임들의 엽기적인 폭행으로 사병이 사망한 사건 등에 임하여 우리는 불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만약 어떤 이유로든지, 시사적인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는 종도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자기점검을 하는 데 또 다른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종단이 중시하는 <범망경> 대승보살계목(산 목숨 죽이지 말라 ·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 삿된 음행 하지 말라 · 거짓말 하지 말라 · 술을 팔지도 먹지도 말라 ·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 자기를 칭찬하지 말며 남을 비방하지 말라 · 인색하지 말며 구하는 이를 욕되게 하지 말라 · 성내지 말며 참회하면 받아 주라 ·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그 하나하나를 들어서 자기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해 동안 태고종도로서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통계청 사회조사결과(2013년)에 의하면 직전 1년 동안에 만 13세 이상 국민의 약 33%가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개인이나 단체에 현금을 기부한 적이 있고, 물품을 기부한 경우도 약 6%에 달한다. 자원봉사는 약 20%가 참여하였고 봉사시간은 평균 25시간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 기준치, 즉 세 명 중 한 명은 현금을 기부하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자원봉사를 한다는 통계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불자들과 그 중에 태고종도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지 저러니 해도 불교를 믿는 대중의 기부와 봉사활동이 범국민 평균치보다는 상위 수준에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계는 곤란에 처한 이웃들을 구제하는데 책임감을 가졌고 상당부분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다.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계의 역량이나 기여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불교계에 잠재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계의 잠재력이란 무엇이며, 종단의 역량이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불교계의 잠재력은 불교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과 역량의 총화이다. 다시 말하면, 태고종도 개개인이 대외적으로 얼마나 기부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에 따라서 태고종단의 사회적 역량과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 개개인은 보시나 봉사활동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혹시 우리 종단이나 우리 절이 개신교회나 가톨릭성당보다 사회적으로 뭔가를 더 잘 해주기를 바란다면, 불합리한 기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또 한 편으로 종단과 사찰의 경영자들은, 소속신도가 보시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함과 아울러 직접 실행할 기회도 제공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종단은 단위사찰들을 통해서 수많은 법회를 열고 지속적으로 종도들을 교육해오고 있는데, 그 법회의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법회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각자의 생활에 반영해서 질적으로 삶이 성장하는 경험을 하도록 고안된 장치들(제도들)이 필요하다.
이런 기회에 필자의 솔직한 기대를 말하자면, 새해에는 태고종 소속사찰이라면 크거나 작거나 모두 예외 없이 ‘對사회 자원봉사단’을 발족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중앙종단에는 ‘사회복지위원회’나 ‘사회문제연구소’와 같은 전문기구를 두고, 사회복지법인 설립이나 사회복지기관 개설을 지원하는 부서 등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태고종을 비롯한 여러 승가공동체들의 원대한 포부 중 한 가지는 ‘사회 속에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자’는 것이니만큼 거기서 구체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우선 사회문제들을 상당히 잘 알고 중생의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자들 사이에서 익숙한 어휘인 ‘중생의 고통’ 혹은 ‘구제’라는 말은 너무나 각양각색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실상 그런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너 나 없이 민감하겠지만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불자로서 돌아봐야 할 일이다.
더욱이 우리 시대의 고통이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자체에 대해서 불자들끼리(종도들끼리) 진지하게 의논은 해보았던가. 어쨌거나 혹시 불자들이 나름의 보시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면 그런 고통들이 해소되기는 하는 것인가. 어떤 차원에서 보더라도 승가 구성원들의 역할을 설계할 때에는 공동체적 이해와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과연 우리 불교계에서 그와 같은 조직적 성찰의 과정이 충분하게 있어 왔던가?
부디 태고종의 새해에는 종도들의 선의(善意)를 모으고 섭수(攝受)하는 법석(法席)들이 타에 모범적으로 활발히 열렸으면 좋겠다.
현재 대한민국의 고통스런 문제점들을 열거하기에는 이 지면이 부족할 것 같다. 우리 불교계 전체를 움직인다 해도 온갖 사회문제에 대해서 만능의 해결사가 되지는 못한다. 하물며 어느 종단이 홀로 중생의 온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막연히 선언할 바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태고종도들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구호(口號)인가. 시기와 장소 그리고 자원이라는 조건[因緣法]을 감안하면서, 우리 종단이 혹은 우리 절이 지금 무엇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책임주체와 절차를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말한 종단 부설 전문기구들의 일이 그것이고, 사찰단위로 보면 자원봉사단과 같은 조직체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라고 본다.
행여 다른 종교계가 곧잘 하고 있는 사회참여나 복지활동분야가 있다고 해서, 우리 불교계도 그것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불자 개인으로서나 불교계 전체로서나 적절하게 개입하고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판단하고 선택해서 고유한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무엇이 이 시대의 고통이며, 무엇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방법이 될 것인지를 철저하게 불교적인 안목으로 탐색해야 한다. 불자라면 문제를 판단하는 관점이 불교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불교적이어야 옳을 것이다.
문제의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은 이미 심각하게 사회경제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주관적인 소회(所懷)가 아니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의 지표들에 의해서 평가된 바이다. 불교사회연구소가 2011년부터 매년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도 불교인의 약 55%가 양극화현상을 타개할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빈부격차 및 실업· 부정부패와 공정성 상실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소위 중생의 고통이란 모호하고 막연한 개념의 그 무엇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절박한 우리 현실 그 자체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구제한다는 것은 온정적인 보시나 봉사를 넘어서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작업(作業)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총생산이 늘어난다 해도 절대적 빈곤 및 상대적 빈곤은 심화되고 있다. 생산의 과실(果實)을 구성원들이 나눠 갖는 것이 경제활동인데, 분배 및 재분배의 사회적 장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극화의 해결에 있어서 불교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집중 모색할 차례다.
또, 우리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23개 국가 중 최하위를 6년째나 기록한다고 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청소년의 비율이 OECD 국가들의 평균치보다 크게 낮았다. 가정의 화목을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지만 가정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외롭다고 느끼는 청소년의 비율이 OECD 평균치보다 훨씬 높았다. 성적과 학습에 대한 부담 등으로 불행하게 느끼는 청소년이 너무나 많은 작금(昨今)의 상황에 대해서, 불자들은 청소년들의 그 아픔을 얼마나 공감하며 어떤 해법을 마련하고자 하였는가.
어디 그 뿐인가, 청년 실업율은 우리나라 전체 실업율의 두 배 이상으로 거의 변함이 없고, 외국의 노인들에 비해서 우리나라 노인들이 더 늙도록 일하고 오랜 시간 일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년기까지도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스스로 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성인자녀를 돌봐야 하는 희생

▲ 이 혜 숙<금강대학교 객원교수>
적인 가족문화와 노인의 높은 자살율 등은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난제(難題)들이다. 여기에 불교계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 주위에 불안한 청년들과 과로하는 노년들을 위해서 우리 불자들이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는 있는가.
소위 중생의 고통이란 모호하고 막연한 개념의 그 무엇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절박한 우리 현실 그 자체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구제한다는 것은 온정적인 보시나 봉사를 넘어서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작업(作業)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불교태고종의 새해는 보살불교의 서원을 진일보(進一步)시키는 동력(動力)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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