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가 살 수 있는 길은 붓다의 삶에 있으며, 붓다의 개척정신으로 돌아가는 방법뿐”

▲ 붓다스터디 개척자 학교는 부처님의 생애를 현대사회의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역사적 통찰일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을 기반으로 ‘개척’ 불자를 양성하기 위해 개설됐다. 참여불교재가연대 부설기관 불교아카데미는 ‘붓다 석가모니’ 영상 10부작을 교재로 하는 ‘붓다 스터디’ 개척자 학교를 개설, 지난 12월 2일 2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사진제공=참여불교재가연대
‘개척정신’은 원래 불교 것이다. 본래 불교도의 삶이다. 탁발유행(托鉢遊行)이 바로 그것이다. 온 생애를 바쳐 변방으로 변방으로 달려가 담마를 전파하고 이 세상을 정의롭게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했다. 바로 이것이 ‘개척(開拓)’이다. 이것이 불교적인 삶의 원형이다. 붓다께서 확립하신 불교도 삶의 원형이다. 청정한 삶의 원형이다. 출가는 출가의 방식대로, 재가는 재가의 방식대로 이 거친 개척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부부끼리 싸우고, 부모 자식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동료끼리 싸우고 있다. 동포들끼리도 싸우고 있다.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서 싸우고, 남과 북으로, 노사로, 그리고 남과 여 및 노(老)와 소(少)로도 싸우고 있다. 청교도의 도덕성을 자랑해온 미국도 흑 백으로 갈라져 싸우고, 중국·러시아는 소수민족에 대한 패권주의로 싸우고, 인도는 카스트로, 여성학대로 싸우고 있다. 유사 이래 인류가 싸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지금 우리는 더욱 잔인하게, 더욱 조직적으로, 더욱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을 말리고 화해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종교들끼리도 싸운다. 종교들끼리는 더욱 살벌하게 싸우고 있다. 종교들끼리의 폭력이 도리어 인류의 폭력적 투쟁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인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천년이 훨씬 넘는 종교전쟁으로 평화를 잃고 죽음으로 내몰려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벌여온 매우 잔인한 종교폭력은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유태교/가톨릭(천주교)과 이슬람이 줄기차게 싸우더니, 이제는 개신교까지 가세해서 싸운다.
중동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어지고, 보복과 보복이 끊임없는 악순환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의 목을 베고 그 영상을 찍어서 세계에 전파하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평화’ ‘사랑’을 외친다. 지금 인류는 ‘평화’와 ‘폭력’이 동거하고 ‘사랑’과 ‘증오’의 두 얼굴을 가진 그런 모순된 종교를 ‘구원’으로 강요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싸움이 그치지 않는 지구촌

불교는 그러면 조용한 것인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불교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런데 이 불교도 내면적으로는 심각한 분열과 갈등, 정신적 폭력으로 다투고 있다. 남방불교/북방불교가 마치 적처럼 서로 대립하고 있다. 남방불교는 ‘북방불교는 불설(佛說)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고, 북방불교는 ‘남방불교는 소승이다’ 하고 매도해 왔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마치 원수진 사람들같이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다.
부파/종파들끼리 반목하고, 교(敎)/선(禪)이 반목하고, 출가/재가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 우리는 일불제자(一佛弟子)라 흔히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불교도가 아닐지 모른다.
‘정화다, 뭐다’ 하면서 승단이 갈라져 싸우더니, ‘종권이다, 뭐다’ 하면서 출가자들끼리 줄기차게 싸우고 있다. ‘승려들이 싸운다’ 며 비난해오던 재가자들 도 일부가 ‘왜 싸우냐?’면서 싸움판에 덤벼들어 또 싸우고 있다.
일부 불교단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구성원들끼리 서로 불화하고 걸핏하면 불신임하고 재판을 걸거나, 서로 비난하며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매도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떠나버렸다. 불교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역사적 역할을 망각하고, 무력(無力)해지고, 스스로 자멸(自滅)의 길로 내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심히 우려스럽다. 사자충(獅子蟲)으로 인하여 스스로 쇠망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시비를 가리고 정사(正邪)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이 도도한 시대적 탁류(濁流), 이것이 바로 ‘삼계개고(三界皆苦)’일까?
기원전 624년 웨사까 달력 2월 보름 룸비니 동산 아기 붓다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하늘에서 땅에서 나 홀로 존귀하네.
온 세상이 고통 속에서 해매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탄생게, 수행본기경)

‘온 세상이 고통 속에서 해매니(三界皆苦)…’ 지금 우리 상황은 2천 7백년 전 붓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붓다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탄식하고 계신다.
“브라흐마나여, 지금 사람들은 법답지 못한 욕망에 물들고 비뚤어진 탐욕에 압도되고 삿된 교리에 빠져있다. 그들은 법답지 못한 욕망에 물들고 비뚤어진 탐욕에 압도되고 삿된 교리에 빠져 예리한 칼을 쥐고 서로의 생명을 뺏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서로 생명을 뺏는 이 폭력적 상황과 사람이 눈 빤히 뜨고 사람을 죽이는 이 절망적 상황이기에, 예리한 칼로 사람 목을 자르며 승리를 노래하는 이 절망적인 폭력시대에 살기에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붓다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사회가 갈수록 갈등과 혼란에 빠져들고 있기에, 2천 7백년 전 인도 민중이 그렇게도 큰 영웅(大雄), 승리자(Jina)를 대망했듯, 지금 우리도 다시 한번 부처님 오시기를 대망하고 있다.

붓다의 ‘거친’ 개척정신

‘전법 12년(붓다 47세), 붓다와 대중은 농장주인 아그니닷따(Agnidatta)의 초청을 받고 멀리 서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는 웨란자(Veranja)로 유행하셨다. 그러나 그때 흉년이 크게 들자 아그니닷따는 약속을 어기고 공양을 거부하였다.
곤경에 빠진 대중들이 마침 지나가던 상인들이 보시한 말먹이용 보리(馬麥)를 얻어, 이 험한 보리로 밥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부처님은 이 거친 보리밥을 맛있게 드시고 한 철을 보내셨다.(불설중본기경 15, 佛食馬麥品 ; 한글대장경 11권 ; 김재영, 초기불교개척사 p.405 ; 앙굿따라니까야 2권, p.169)’

경전에 묘사된 바와 같이, 걷고 걸어서 변방으로 변방으로 끝없이 나아간 붓다, 말먹이용 보리를 맛있게 먹고 동포들에게 담마를 전파하는 붓다와 초기 대중들은 이렇게 이 세상을 정의롭게 변화시키고 동포들의 고통을 치유했었다. 붓다 석가모니는 바로 이렇게 거친 개척의 삶을 사셨다. 전법고행 45년, 낡은 수레처럼 무너져가면서도 ‘거친’ 개척의 삶을 거침없이 사셨다. 바로 이 거친 개척의 삶이 붓다의 삶이고 초기불교도의 삶이다. 불자들 삶의 원형이 바로 이것이다.
‘개척’ ‘개척불교’ 하니까 타종교를 모방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개척정신’은 원래 불교 것이다. 본래 불교도의 삶이다. 탁발유행(托鉢遊行)이 바로 그것이다. 아침마다 거리로 나가 정(淨) 부정(不淨) 구분 없이 밥을 빌고 동포들에게 담마를 전파한다. 온 생애를 바쳐 변방으로 변방으로 달려가 담마를 전파하고 이 세상을 정의롭게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했다. 바로 이것이 ‘개척(開拓)’이다. 이것이 불교적인 삶의 원형(原形)이다. 붓다께서 확립하신 불교도 삶의 원형이다. 청정한 삶(淸淨梵行)의 원형이다.
출가는 출가의 방식대로, 재가는 재가의 방식대로 이 거친 개척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거친 개척의 삶, 개척정신, 이것이 불교도의 참된 정신이고, 초기불교 성공의 역동적인 동력(動力)이다.

기원전 545년, 팔순의 늙고 병든 노(老)붓다는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웨살리(Vesali)에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간곡하고 설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이제 여든 살 늙고 쇠하였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듯
나 또한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고 있느니라.
아난다여, 그대들 자신을 등불삼고 그대들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라.
다른 사람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여래의 삶[Dhamma, 法]을 등불삼고 여래의 삶을 귀의처로 삼아라.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아난다여, 어떻게 하는 것이 자등명 법등명 하는 것인가?
사념처(四念處)를 통찰하는 것이다. 곧 사띠하는 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등불 삼고, 여래의 삶을 등불 삼고 ~ ’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부처님의 간절한 호소이다. 부처님은 지금 우리가 낡은 수레처럼 무너져 내리면서도 거친 개척의 길로 나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위대한 평화의 정신-평화의 역사를 상속하고서도, 우리가 못나게 서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은 붓다의 거친 개척의 삶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견성’이니 ‘해탈’이니 하면서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머리만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처에 ‘개척자학교’ 열려야

이제 우리 차례다. 불교 아이콘을 ‘개척’으로 확 바꾸어야 한다. 낡은 관념을 싹 걷어치우고 거친 세상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도처에 ‘개척자학교’가 열려야 한다. ‘붓다 스터디’ 운동이 펼쳐져야 한다. ‘붓다 스터디’ 란 붓다의 삶을 오롯이 배우고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처님을 모르면서, 그 절절한 삶을 모르면서, 아는 척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왔다.
불길을 이미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수원에서… 곳곳에서 개척자학교가 열려야 한다. 지금은 비록 척박하지만 내일은 빛날 것이다. 이것은 도도한 대세이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울 때, ‘老붓다의 고백’을 외우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자. 이 세상을 구원할 궁극의 등불은 바로 나 자신, 구원의 귀의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에, 당당주인으로 떨치고 일어나 인생과 불교, 세상을 개척해야 한다.
한국불교가 살 수 있는 길은 붓다의 삶에 있으며, 붓다의 삶인 거친 개척정신으로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 김재영불교학 박사, 동방불교대학 교수
우리가 잃어버린 보배가 ‘붓다(Buddha)’ ‘빠리사(Parisa)’ ‘사띠(Sati)’이다. 이 세가지 보물을 회복해야 불교가 살아난다고 나는 확신한다.
붓다의 개척정신으로 돌아가 그분의 삶을 본받고 도처에 평등한 빠리사를 만들어 둘러(pari) 앉아서(sa) 순간순간 알아차리고 안팎으로 대면하며 사띠(sati)해야 한다. 붓다의 삶과 평등 공동체(빠리사) 수행(알아차림, 사띠)을 위한 개척정신이 살아나면 교리불교, 선정불교, 출가우월주의 등 모든 불교 모든 부파가 ‘붓다의 불교’로 살아나고 인류의 삶도 새롭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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