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31호(2014년 12월 17일자) 칼럼

▲ 혜 일(불이성 법륜사 주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뉘우침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긴 밤 동안 쓸데없는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잡아함경>
모든 인간들의 삶이 완벽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실수를 한다. 자의건 타의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남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욕망과 아집에 의해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제하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 참회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다.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나중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죄를 짓더라도 알고 지어야 죄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잘못됨을 알아야 참회하고 그 행동을 중단할 수 있다. 우리 불교에서 참회법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우리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길 때는 복잡해진다. 피해자는 원망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마침내 공격적인 복수극을 유발한다. 받은 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다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탄다. 이 같은 증오와 복수의 반복은 서로를 원수로 만들어 끊임없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
원망과 복수의 관계는 빨리 풀수록 좋다. 증오는 자신과 남을 망치지만 참회와 용서는 자신과 남을 살린다. 물론 남을 용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피해의식이 해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피해의식에 앞서 자신이 가해자의 입장에 선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타인에 대해 가해자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회하는 사람에게 복수의 돌을 던지는 것은 가해자보다 더 옹졸한 사람이다. 만약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상대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용서 못할 일이 없다. 불도(佛道)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죄를 지었으면 참회해야 하고 남의 허물을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도를 닦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용서 못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극악무도한 살인마 앙굴마라까지 용서한 것은 그가 부처님과 같은 불성이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악인이란 원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으로 인해 일으킨 허물일 뿐이다. 그것만 밀어내면 누구도 맑고 밝은 불성의 존재임을 아신 부처님은 일체 모든 사람을 자비의 품에 들어오게 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적은 사회에 살고 있다. 먼저 참회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고개 숙이기를 요구한다. 아량이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느 쪽이든 먼저 참회하고 용서하는 쪽이 승자(勝者)이고, 매듭을 푸는 열쇠를 갖는다.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내지 말라. 누가 너에게 성내어도 성냄으로 갚지 말라.” <잡아함경>. 또 부처님께서는 “누가 와서 그대의 팔을 자르더라도 원망하지 말라. 치료를 해 주어도 반가운 마음을 내지 말라.”고도 하셨다. 이것은 복수심과 증오심으로는 화해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혁신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면한 과제가 여러 가지 있지만 종단 내부를 들여다보면 검은 구름만 가득하다. 누가 이러한 일들을 만들었을까? 우리 모두의 업(業)에 의하여 만들어졌지만 종단의 일부 지도자들이 올바른 생각과 행(行)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소위 ‘비상대책위’라는 명분 아래, 종단에 현안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이런 문제를 현 집행부와 의논하려고는 않고 종권을 탈취하려고 하는 ‘무지한 소인배들’이 나타나 종단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총무원 문 앞에 와서 문을 부수고 도망가는 모습, 또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등 세간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일들을 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현 집행부가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 모신 곳을 교회에 매각하고, 종단에 엄청난 빚을 남긴 사람들, 동방불교대학 운영을 파행으로 몰고간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현 집행부에는 반기를 드는 것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지금이라도 함께 화합하여 현안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하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다.
혁신이란 힘들고 괴롭다. 그야말로 고행이다. 먼저 우리가 혁신하고 상대방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고 상대를 고치려고 하면 안 된다.
나는 가끔 선암사 무우전에 계시는 종정스님을 친견할 때마다 스님께서 평소 생활하시는 모습을 전해 듣고는 늘 감동을 받곤 한다. 항상 고맙고 가피를 입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승려인 우리들은 각자가 맡은 의무에 충실하고, 스님의 본분사가 무엇인가를 잊지 말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늙음, 병,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그것을 해결할 생각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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