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31호(2014년 12월 17일자) 아함경 강의

연기하며 유위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열반·깨달음의 세계가 전개

무명(無明)이 소멸하면 행(行)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識)이 소멸하며, 식이 소멸하면 명색(名色)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육입(六入)이 소멸하며, 육입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하면 수(受)가 소멸하며, 수가 소멸하면 애(愛)가 소멸하고, 애가 소멸하면 취(取)가 소멸하며, 취가 소멸하면 유(有)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하면 생(生)이 소멸하며, 생이 소멸하면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완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 이것은 괴로움이 소멸하는 원리를 밝힌 환멸문(還滅門)이다

심심경(甚深經)

[원문]
(二九三)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世尊告異比丘:“我已度疑, 離於猶豫, 拔邪見刺, 不復退轉. 心無所著故, 何處有我? ?彼比丘說法, ?彼比丘說, 賢聖出世空相應, 緣起隨順法. 所謂有是故是事有, 是事有故是事起. 所謂緣無明行, 緣行識, 緣識名色, 緣名色六入處, 緣六入處觸, 緣觸受, 緣受愛, 緣愛取, 緣取有, 緣有生, 緣生老?死?憂?悲?惱?苦. 如是如是純大苦聚集, 乃至如是純大苦聚滅.
如是說法, 而彼比丘猶有疑惑猶豫, 先不得得想?不獲獲想?不證證想. 今聞法已, 心生憂苦?悔恨??沒?障?. 所以者何? 此甚深處, 所謂緣起, 倍復甚深難見, 所謂一切取離?愛盡?無欲?寂滅?涅槃; 如此二法, 謂有??無?, 有?者若生?若住?若異?若滅, 無?者不生?不住?不異?不滅, 是名比丘諸行苦寂滅涅槃. 因集故苦集, 因滅故苦滅, 斷諸逕路, 滅於相續, 相續滅滅, 是名苦邊.
比丘! 彼何所滅? 謂有餘苦, 彼若滅?止????息?沒?所謂一切取滅?愛盡?無欲?寂滅?涅槃.”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어떤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의심을 벗어났고 망설임을 여의었으며 삿된 소견의 가시를 뽑아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다.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는데 그 어느 곳에 나[我]라는 것이 있겠느냐? 나는 저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설했고, 저 비구들을 위하여 현성(賢聖)이 세상에 나와 공(空)과 서로 호응하여 연기수순법(緣起隨順法)을 설했다.
그것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으며,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며, 수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老]?죽음[死]?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 이와 같이 완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법하였건만 그래도 저 비구들은 아직도 의혹과 망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찍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생각하고,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했다 생각하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법을 듣고서도 마음에 근심과 괴로움?후회(後悔)와 원망?흐리멍덩함에 빠짐?막히고 걸림이 생겼다. 왜냐하면 이 매우 심오한 이치는 이른바 저 연기(緣起)보다 몇 곱이나 더 깊어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니, 즉 일체의 취함을 여읨[一切取離]?애욕이 다함[愛盡]?탐욕이 없음[無欲]?번뇌의 경계를 떠남[寂滅]?열반(涅槃)에 드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른바 함이 있는 법[有爲]과 함이 없는 법[無爲]이다. 함이 있는 법이란 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달라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이다. 함이 없는 법이란 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며 달라지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을 비구의 모든 행의 괴로움이 적멸해져서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인(因)이 발생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고, 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소멸한다. 모든 경로를 끊고 서로 이어가는 것을 없애고, 서로 이어가는 것을 소멸하는 것마저 다 소멸하여 없애면 이것을 괴로움의 끝[苦邊]이라고 하느니라.
비구여, 저 어떤 것을 소멸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이니, 그것이 만일 소멸하고 그쳐 맑고 시원해지며 쉬고 사라지면, 일체의 취함을 여읨[一切取離]?애욕이 다함[愛盡]?탐욕이 없음[無欲]?번뇌의 경계를 떠남[寂滅]?열반(涅槃)에 드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293경 <심심경(甚深經)>(≪대정장≫ 2, p.83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만 전승된 경이라는 뜻이다. ≪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에서 전승한 아가마(?gama)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경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설일체유부의 사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의 이름인 <심심경(甚深經)>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을 이해하는 것은 연기(緣起)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어서 보기 어렵다는 대목에서 따온 것
이다. 이 경에서는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의 발생과 소멸의 원리를 통해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연기법에 속하는 것은 유위법에 해당되고, 연기법에 속하지 않는 열반은 무위법(無爲法)에 해당된다는 것이 이 경의 핵심이다.
이 경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다.(有是故是事有 是事有故是起)”라고 한 것은 ‘연기의 공식’을 말한 것이다. ≪잡아함경≫의 다른 경에서는“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로 번역했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좀 다르게 번역되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번역을 여기에 추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경에서 언급한 것은‘연기의 공식’가운데 일부인데, 완전한 ‘연기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此滅故彼滅)

위‘연기의 공식’에서 전반부는 유전문(流轉門)의 연기를 설명한 것이고, 후반부는 환멸문(還滅門)의 연기를 설명한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으며,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며, 수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가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한다. 이것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를 밝힌 유전문(流轉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반대로 무명(無明)이 소멸하면 행(行)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識)이 소멸하며, 식이 소멸하면 명색(名色)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육입(六入)이 소멸하며, 육입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하면 수(受)가 소멸하며, 수가 소멸하면 애(愛)가 소멸하고, 애가 소멸하면 취(取)가 소멸하며, 취가 소멸하면 유(有)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하면 생(生)이 소멸하며, 생이 소멸하면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완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 이것은 괴로움이 소멸하는 원리를 밝힌 환멸문(還滅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 비구들은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의혹과 망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찍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생각하고,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했다 생각하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음에 온갖 근심과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일체의 취함을 여읨[一切取離]?애욕이 다함[愛盡]?탐욕이 없음[無欲]?번뇌의 경계를 떠남[寂滅]?열반(涅槃)을 증득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른바 함이 있는 법[有爲法]과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다. 유위법이란 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달라지기도 하고 소멸하
기도 하는 것이다. 즉 유위법은 생(生)?주(住)?이(異)?멸(滅)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무위법이란 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며 달라지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즉 무위법은 무생(無生)?무주(無住)?무이(無異)?무멸(無滅)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무위법을 모든 행의 괴로움이 적멸한 열반이라고 한다.
연기법에 의하면, 원인과 조건에 의해괴로움이 생기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 괴로움이 소멸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괴로움의 끝[苦邊]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곧 일체의 취함을 여읨[一切取離]?애욕이 다함[愛盡]?탐욕이 없음[無欲]?번뇌의 경계를 떠남[寂滅]?열반(涅槃)이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고 설해져 있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천한다. 어떠한 것도 시간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거나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에 집착하여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기본교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이 무상한가?‘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만들어낸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한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상주불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존재는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유위(有爲)’인 것이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 즉 열반?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인 것이다.
불교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최소 단위는 찰나(刹那)이다. 이것은 끄샤나(k?a?a, P. kha??)를 음사한 용어이다. 찰나멸론(刹那滅論, k?a?a-v?da)은 초기불교에서는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으나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각 부파들은 찰나멸론을 무상(無常, anicca)의 교리와 결부시켜 논리적인 관점으로 상세히 설명된다. 즉 상좌부(上座部, Sthavirav?da)는 ≪앙굿따라 니까야(A?guttara-nik?ya)≫에 나오는 “일어남이 알려져 있고 사라짐이 알려져 있고 머물러 있는 것의 변화가 알려져 있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것에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있다.(Upp?do pann?yati vayo pann?yati ?hitassa annathatta? pann?yati. Im?ni kho bhikkhave t??i sa?khatassa sa?khatalakkha??ni ti.)”
(AN Ⅰ, p.152)라는 붓다의 말씀을 근거로 모든 유위법(有爲法, sa?khata-
dhamma)이 일어남(生, upp?da)과 머묾(住, ?hiti)과 무너짐(壞, bha?aga)의 세 단계 찰나(tayo-kha??) 또는 세 가지 특성(三相)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반면 설일체유부는 모든 유위법(sa?sk?ta-dharma)이 생겨남(生, j?ti), 지속(住, sthiti), 다름(異, anyayh?tva), 무상(無常, antityat?, 滅)의 네 단계 찰나 또는 네 가지 특성(四相)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법의 고유한 성질(自性, dravya/svabh?va)은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설일체유부의 사유방법에 대해 경량부(經量部)는 모든 유위법은 현재 한 찰나에만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에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모든 유위법은 생겨난 순간 소멸한다는, 글자 그대로의 찰나를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경량부의 찰나멸론은 ≪아비달마구사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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