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31호(2014년 12월 17일자) 특강

세 가지 보시와 여섯 가지 바라밀로 ‘짚’을 삼아 정성껏 ‘줄’ 엮으시길…

“을미년(乙未年) 첫새벽이 멀지 않습니다. 새해 달력을 거실 때 벽에 걸린 시계에는 무상계(無常計)를, 자주 보는 거울에는 무아경(無我境)을, 매일 찾는 화장실에는 해우소(解憂所)를 써 붙이셔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삼법인의 이치를 되새기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모에 되새겨보는 ‘삼법인(三法印)’

실내의 온도와 습도 그리고 조명관리에 유난히 공을 들이는 곳이 있다. 백화점이나 카지노가 그런 곳이다. 일상사를 잊고 쇼핑이나 놀음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것이다. 또,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시계와 거울 그리고 창문이란다.
쇼핑을 하다 시계가 눈에 띄면 백화점에 들어 온 시간을 따져보게 되고, 놀음을 하다 거울을 보면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시계요 거울이라는 얘기다. 창문도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 오기 때문에 이런 건물에는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모양 뿐 제 역할은 거의 없다.

‘諸行無常’ 이치 깨우쳐주는 시계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십 수 년 전, 태고종 산하 정토 백련사(白蓮寺)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해야겠다.
백련사는 신라 경덕왕 6년(747) 진표율사께서 창건하신 사찰로서 천년을 훌쩍 넘긴 고찰이며 사명(寺名)에서 알 수 있듯 정토신앙의 도량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유명하다.
총무스님의 안내로 법전에 들어 막 참배를 하려는데, 주불이신 아미타불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상단 탁자 중앙에 걸린 커다란 시계였다. 지름이 50㎝는 족히 돼 보이는 검은 색 둥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법전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그런 광경이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지 싶어 시계가 걸리게 된 연유를 물었다. 총무스님 말씀인즉, 시력이 언짢으신 어느 노덕스님을 위한 대중스님들의 배려라 했다. 순간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다. 뵙지는 못했지만, 세월의 무게에 힘겨워하시는 노스님의 모습과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드리려는 대중스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어색하다는 마음만큼은 떨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 총무스님에게 시계 밑에 ‘무상계(無常計)’라고 써서 붙일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총무스님은 혹시 ‘무상게(無常偈)’나 ‘무상계(無常戒)’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되물었다.
그래서 말했다. 무상은 형이상의 개념이기에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시계라는 문명의 이기는 무상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다시 말해 형이하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기막힌 작품임을…. 따라서 삼법인의 첫 번째 덕목인 제행무상을 적극적으로 각인시키는 방편으로 활용하자는 의도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노덕 스님을 향한 대중스님들의 따뜻한 마음도 살리는, 이른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보자는 제안배경을 설명했다. 총무스님도 쾌재를 부르며 실천에 옮겨 보겠다고 공감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시계만 보면 그때 그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나로서는 무상 가운데서 상(常)을 건진 셈이다.

‘諸法無我’ 이치 일깨워주는 거울

처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잠깐 사이에 낸 아이디어치고는 꽤나 참신하다 싶었다. 내친김에 제법무아(諸法無我)를 표현할 만한 것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시계만큼이나 자주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그래서 거울의 이름을 ‘무아경(無我境)’이라 붙여보았다. 당장은 비춰볼 자신의 모습이 있지만 얼마만큼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과연 지금의 이 모습이 존재할까?! 지난 세월의 몇몇 분을 떠올려보니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었다.
나름 괜찮다고 판단했다. 허무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의 존재에 대해 자 비와 지혜에 바탕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접근해보자는 것이 취지다. 조화(造花)가 아닌 생화라야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지 않던가?!
‘돌을 던지면 미련한 개는 돌을 물고,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문다(韓盧逐塊 獅子咬人)’라 하신 고봉선사(高峰禪師)의 말씀이 생각난다. 세상만사를 허무하다고 생각하든지 소중하다고 생각하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몫이다.

‘涅槃寂靜’ 이치 실감케 해주는 해우소

‘무상계’와 ‘무아경’이라는 말을 생각해낸 나 자신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삼법인의 세 번째 덕목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찾아보았다.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조어(造語)인 ‘해우소(解憂所)’였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배고픈 것을 참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이 배설(排泄)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글자 수도 셋이니 안성맞춤이다.
참, 경봉스님의 조어 가운데 ‘휴급소(休急所)’라는 것도 있다. 해우소는 큰일, 휴급소는 작은 일을 보는 곳이란다. 급함을 쉬게 해주는 곳…. 정말로 급한 일이 무엇인지? 근심거리는 무엇인지? 크고 작은 일을 볼 때만이라도 생각해볼 일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일상을 잠시 쉬고 또, 근심을 내려놓고 주변의 모습과 매순간의 소중함을 느껴보실 것을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이를 실감하는 데는 장소도 중요할 터. 순천 선암사를 추천하는 바이다. 그곳에는 해우소 ‘깐뒤’도 있다.

황희 정승과 유종의 미

어쨌거나 노랫말처럼 무정한 세월은 갖가지 사연을 뒤로한 채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덧 연말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이 때쯤이면 생각나는 말이 ‘유종(有終)의 미’다. 그리고 황희 정승에 얽힌 일화가 함께 묻어나온다.
황 정승 집에 하인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충직하고 근면한 두 사람이 있었다. 정승은 이들의 그런 점을 고맙게 생각하고 종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두 하인을 불러 말했다.
“너희들이 그간 보여준 근면함을 가상히 생각한다. 해서 종의 신분으로부터 방면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느니라.”
두 하인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하고 얼떨떨해 하는 그들에게 정승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너희가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도록 다소간의 재물을 주려하니 그리 알아라. 그런데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 줄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다름 아니라 새끼줄을 좀 꼬아줘야겠다. 양(量)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자! 그러면 내일 새벽에 보자꾸나.”
정말 도깨비에게 홀려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종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는 것만도 황송한 일인데 재물까지 준다니 두 사람은 형용하기 어려운 흥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 흥분이 가라앉자 방금 전 황 정승의 말씀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얼마나 고마우신 어른이신가. 하해 같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꼬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밤이 이슥하도록 정성을 다해 새끼줄을 꼬았다.
한편, 다른 사람은 ‘고맙기는 고마운데, 따지고 보면 그간 내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한 때문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방면해주는 마당에 끝까지 부려먹을 건 또 뭐람.’하고 새끼줄을 꼬는 둥 마는 둥 잠이 들었다.

한 생각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

새벽이 되자 두 사람은 간밤에 꼬아놓은 새끼타래를 들고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정승의 처소로 갔다. 황정승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의 인사를 받고 그간의 노고를 다시 한 번 치하한 후 한 쪽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엽전이 든 궤짝이 놓여 있었다. “너희들이 꼬아 온 새끼줄에 저기 궤짝에 있는 엽전을 꼽을 수 있을 만큼 꼽아 가도록 해라.”
순간 두 사람의 희비는 엇갈렸다. 유종의 미가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보여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때, 여래께서 걸림 없고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널리 법계의 모든 중생을 살피시고 말씀하셨다.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모든 중생들이 어리석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구나. 내가 그들 자신에게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는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있다는 성스러운 길을 가르쳐 영원히 망상과 집착을 여의게 하리라.
(爾時 如來以無障애淸淨智眼 普觀法界一切衆生而作是言 奇哉奇哉 此諸衆生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 我當敎以聖道 令其永離妄想執著 自於身中得見如來廣大智慧與佛無異)

누군가 말했다. “저는 부처님의 종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소리냐. 네 주인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신앙을 통한 수행은 주인다운 주인이 되게 하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중생이 아니다. 종은 더더욱 아니다.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는 불성을 갖춘 부처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면 원(願) 역시 부처님과 같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계신 부처님 여러분! 이제 지혜의 심지를 돋우시고 자비의 등불을 한껏 밝히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께서 그러셨듯 세 가지 보시와 여섯 가지 바라밀로 짚을 삼아 정성껏 줄을 엮으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지만, 그 줄에 꽂을 당신의 참 재산이 너무도 많답니다. 을미년(乙未年) 첫새벽이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해 달력을 거실 때 벽에 걸린 시계에는 무상계(無常計)를, 자주 보는 거울에는 무아경(無我境)을, 그리고 매일 찾는 화장실에는 해우소(解憂所)를 써 붙이셔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삼법인의 이치를 되새기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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