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환기(前 동명대 교수)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교황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대적인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교황의 방문은 한국불교에도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아직도 교황(敎皇)이라는 이름을 쓰는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중세시대의 황제를 받드는 종교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안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오를 묻어버린 교황의 말과 행동에서 한국불교는 깊이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우선 그는 행동에 있어서 철저하게 친서민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은 차를 이용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낮은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두 손 잡아주는 등의 행보를 통해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는 예전에 한국불교 일부 수행자들이 외제 차와 고급차를 사용하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교황의 행동은 한국사회에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세월호 참사로 빚어진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구원파라는 기독교단체가 있고, 이에 국민적 공분이 기독교로 향하고 있었던 것을 교황의 등장으로 역전을 시켰다. 두 번째는 도박과 음주 등 일부 스님들의 파계행위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었던 불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대비하여 교황은 종교지도자로서 수행자의 생활규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종교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지도자들에게 중생들이 요구하는 종교지도자상이다. 그러기에 대중은 더욱 열광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마지 않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이러한 점에서 교황의 한국방문은 우리에게 화두를 던져준 것이라 하겠다.

지금의 세상은 천민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중생들은 아파하고 있다. 자신과 남을 동시에 괴롭히면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즉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과 남을 동시에 고통스럽게 한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일들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욕망의 이중성이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이 세상의 목탁이 되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과연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파멸이라는 뻔한 결과가 오는 것을 방기하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의 근본원인은 모두 탐욕의 소산이고, 어리석음과 분노의 결과이다. 그것이 모든 생명들을 아프게 하고 더불어 사는 상생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념을 가르치고 있다. ‘상구보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아 현재와 미래의 가치관과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바른 길을 제시하고 대안을 모색하게 하는 지혜이다. ‘하화중생’은 중생들의 삶의 현장에서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함께 고통과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를 겸하여서 길을 제시하고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원효스님이 말한 ‘수레의 두 바퀴’이고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실천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황은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심(下心)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와 중생들과 더불어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口頭禪)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즉 이슈를 발굴하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파사현정의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한 길에 이제라도 나서야 한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생명 살리기는 나를 살리는 길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타종교인인 교황의 방한과정에서 행한 말과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불교는 이론적으로는 좀 더 쉽게 대중이 사용하는 말을 통해 제공해주어야 할 것이고, 이론을 실천하는 일에 용맹정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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