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6호(2014년 8월 13일자) 시론

▲ 이형순 작가
‘파~~’ 최불암의 웃음은 호흡으로만 웃는 웃음이다. 그 웃음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드라마<전원일기> 때문이었다. 극 중 옆방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의식해서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웃게 되었다고 한다. 소리 없는 숨죽인 웃음이었다. 최불암의 웃음이 효심에 의한 배려의 웃음소리였다고 친다면, 당신이 웃는 현재의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일까?
쏟아지는 폭포처럼 천둥웃음 소리를 내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분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분노인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무지개 색깔의 다채로운 감정 중에 어떤 감정을 편식하며 사는지 돌아본 적이 있는가? 특정 감정만을 처세의 도구로 빈번하게 꺼내들지는 않는가? 감정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작금의 사회는 타고난 인간의 감정마저 거세하고 조작해야만 하는, 사회적 도구로 전락했다. 오히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현하며 살면 시대에 덜 떨어진 루저(loser) 취급을 당한다.
감정을 억압하고, 숨기는 일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감정노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통제하고, 조작에 능한 사람을 ‘유능’하다거나 ‘대인관계에 뛰어난’ 사람으로 칭송한다. 웃을 때 웃고, 분노할 때 분노하는 사람은 생존기술이 단순한 하수(下手)여서 만만하게 볼 대상이 되어버렸다.
해가 지고,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대가 되면 감정 조작에 지친 사람들은 넥타이를 풀기 시작한다. 밝은 세상 속에서 억눌렀던 감정의 불꽃놀이를 준비한다. 필수적인 준비물인 술을 허리에 차고 ‘음주 공화국’의 생존법 제1조를 펼친다. ‘대한민국의 감정은 매스 미디어에 있고, 모든 인간적인 감정은 음주에서 나온다.’ 어두운 밤, 네온사인 아래서 억눌린 웃음을 터트리고, 취기로 세상을 벌한다. 집 안의 여성들은 TV 앞, 드라마가 주는 감정의 파노라마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밝음이 사라진, 일몰 후의 대한민국은 감정의 과잉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여유보다는 감정을 날 것으로 드러내어도 되는 사람이나 은밀한 공간을 찾아 억눌린 만큼이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감정을 소비한다. 하지만 그렇게 마트의 상품처럼 소비되어버린 감정은 내일의 삶을 충전시키지 못한다. 비워지지 않는다.
2014년, 대한민국은 상식이 물구나무서버린 사고와 인간의 기본마저 상실한 사건으로 얼룩졌다. ‘속보’라는 이름의 자막만 떠도 가슴이 철렁한다. 또 누가 세상을 등졌고,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을까 하는, 탄식이 새어 나온다. ‘속보’ 투성이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정한 감정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책임을 지우려 해도 미디어가 지목한 그 지탄의 대상만으로는 왠지 불안하다. 지목된 죄인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러한 사건과 사고가 원천적으로 방지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어쩌면 그 죄인은 책임의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희생양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국가기관에 의한 무슨 조작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감정의 출구를 찾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건도 믿지 못하는 사회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싶어도 대중들은 미디어가 모는 대로 감정 조작을 당한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감정을 주입하고 ‘몰이’한다. 미디어는 숙련된 기술로 기민하게 서로 단합하고 타깃을 설정한다. 마치 그 타깃만 제거되면 근본적인 잘못마저도 제자리를 찾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마냥 오도하게 한다. 하지만 보라. 외피만 달라졌지 같은 성격의 사건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잘못된 사회시스템에 의한 사고는 피해자들의 가슴에 더 진한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철저한 조사와 함께 엄중한 ‘책임과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책임 소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만이 앞으로도 최악의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절로절로 흘러야 함을 가르쳐준다. 시민의 주체적인 자각 없이 미디어가 편하게 먹여주는 그들만의 판단으로, 획일화된 감정을 주입 당해서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미디어의 현란하고 의도적인 먹잇감을 자각 없이 먹는 순간, 더는 자신이 내린 판단과 감정을 믿지 않게 된다. 감정을 도둑질당하거나 사회적 기생 생물들의 숙주로 유린당할 뿐이다.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처럼 실천하지 못할 거창한 외침이나 권위에 찌든 거룩한 말씀보다는 내 얼굴에 만져지는 주름진 웃음이나 밥상 앞에 밥풀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분노가 진정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진심의 감정’인지,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조작당한 중생심에 편승한 감정인지 자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형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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