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5호(2014년 7월 22일자) 시론

소셜네트워킹서비스의 약자인 SNS가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SNS의 초(超)연결성은 이미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꽁꽁 묶어 놓은 일종의 ‘감옥’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클릭 너 댓 번이면 익명의 사용자들과도 순식간에 동일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섭기도 하다. 그 독화살이 언제 나 자신을 향해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이야 어쨌든 너나 할 것 없이 SNS을 사용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과 흥미로 시작했던 SNS 놀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쁜 현대인들의 삶을 새롭게 구속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도 흔히 말하는 왕따와 언어폭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SNS는 왜곡된 여론의 발원지이자 유언비어의 생산지가 되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3700만대나 보급된 스마트폰이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그랬겠지만 엉겁결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5060세대로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SNS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젊은 학생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가는 십중팔구 씹히기 일쑤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씹히다’는 다소 상스러운 말은 전화 받기를 거부당한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은 전화로 말하는 대신 문자나 카톡을 통해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파악한 다음 전화를 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눈치도 없이 또 전화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센스 꽝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면 말이 안 통하는 구세대 꼰대로 찍혀 기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디지털 감성보다 아날로그 정서에 익숙한 기성세대들도 내키지는 않지만 SNS를 배워서 눈치껏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동안 트위터와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등에 가입해서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약 6개월 전부터는 SNS 계정을 사실상 탈퇴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글쓴이가 SNS를 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적지 않은 양의 콘텐츠들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정말 반갑지 않은 정보는 인터넷 성 유머와 야한 그림들이었다.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데도 상대방은 마치 칭찬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처럼 최신 버전의 자료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보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참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얼마 전에 정년퇴임한지가 10년도 넘은 70대 중반의 지인이 보낸 제법 용량이 큰 음란자료를 받아보고는 흔히 하는 말로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지성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노신사의 돌발행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까지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SNS를 사용하다보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로부터 받은 파일을 다른 접속자들에게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 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다. 지인은 음란자료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행위를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같은 SNS의 기능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자신을 신세대라고 착각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상식인의 눈에는 그저 철이 없거나 추하게 보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가 하면 도대체 어디서 찾아냈는지 삶의 귀감이 될 만한 감동적인 글귀나 교훈들을 줄기차게 보내주는 사람도 있다. 글쓴이도 처음에는 ‘와우, 이렇게 훌륭한 말을 한 사상가들도 있었던가’ 라는 생각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답장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는 한 결 같이 비슷한 내용의 글모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전송했다. 하루는 부드러운 말로 이런 영혼 없는 글은 사양한다는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훈장증후군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쓴이를 나이어린 학생쯤으로 간주하고 위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빌려 나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듣기 좋은 노래도 어쩌다 한번이라야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 두 에피소드는 글쓴이가 SNS를 중단하게 된 배경 같지 않은 배경이 되었다. 너무 유별난가.

이외에도 SNS의 사용과 관련된 불평불만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전통적 의미의 인성(人性)이 디지털시대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도덕명제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그와 같은 도덕적 인식이야말로 SNS 과소비 시대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첨단기술을 사용하는 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컴퓨터가 아니라 실천적 지성의 소유자들인 인간일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고 또 가꾸어 나가야 할 존재론적 당위를 함부로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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