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4호(2014년 7월 3일자) 시론

▲ 서울 약사암 암주 일휴스님
눈물을 흘리며 경탄해 마지않다

현장 삼장 역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7에 나온다. “爾時具壽善現 聞法力 悲泣墮淚. 면仰문淚而白佛言. 그 때 수보리가 법의 위력을 깨닫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우러러 눈물을 훔치며 붓다께 사뢰었다.”
행자라면 누구나 다 고대하는 순간이겠다. 청법(聽法)에 대한 감동은 정신적 생리적으로 더 없는 건강한 눈물을 자아낸다. 무명의 업장을 닦아내는 묘약이라 할까? 바로 반야바라밀의 해탈의 흔적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붓다를 우러를 때는 그 눈물도 훔치는 것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피눈물도 흘린다

망국의 나그네, 고향 산천을 여의고 처자를 등지고 조국의 자립 생존을 갈구하는 망민의 지사가 자아내는 통절의 눈물은 어떠한가? 만해 선사는 이렇듯 ‘두견새’의 울음을 운다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 다 울면
피를 흘려 운다

이별한 한이야 너뿐이랴마는
울래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된 한(恨)을 또 다시 어찌하리

야속한 두견새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나를 보고도
불여귀 불여귀(不如歸 不如歸)

그래도 이러한 피눈물 흘리는 우국지사의 눈물은 건강하기만 하다. 이타(利他)의 눈물이라.

눈물을 훔치는가?

저 숱한 세월 속에는 눈물도 하 그리 흘렸겠거니…. 부모 자식 간에 흘린 애절한 눈물 강(江)이 된 그 사연, 그 깊이를 잴 수 있으련가? 그리운 연인의 별리의 눈물이야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웬일이뇨, 세월호의 침몰이라니. 자식 잃은 통절한 눈물엔 깊이를 잴 수 없는 절망의 나락, 뉘라서 달래겠는가. 조정(弔庭)에는 통감(痛感)의 염(念)이 출렁이기도 하지만, 그 새에 가장하는 눈물의 걱정, 걱정은 또 뭔 일인가. 만해 선사의 ‘우는 때’에는 또 이렇게 운다.

꽃 핀 아츰 달 밝은 저녁 비오는 밤 그 때가 가장 기루운 때라고 남들은 말합니다
나도 같은 고요한 때로는 그 때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사람이 모혀서 말하고 노는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 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야 좋은 말을 합니다만 나는 그들의 위로하는 말을 조소로 듣습니다.
그 때에는 울음을 삼켜서 눈물을 속으로 창자를 향하야 흘립니다.

그예 저 탐욕의 바다 속에 빠지고 만 삼백 여 명의 어린 생명이여! ‘두견새도 못된 한’ 서린 부모의 멍든 심정이여! 아하, ‘제 2의 독화살’은 맞지 말아야 할 텐데… 어이 할거나. 연꽃으로 피어나야 할 텐데. 그 틈에 가장의 눈물 두어 가락 드리워 범부중생 낚으려는가?
고려국 무의자 혜심 선사는 ‘연지(蓮池)’에서 이른다.

잎사귀들 무성하게스리
푸르른 일산으로 흔들거리는데
어여쁜 모습 청정하게도
부처님 자태로 돋아나도다

기이할사
진흙탕에서 살아나다니!
흙탕물은 어떻게
그리도 방편을 얻었을까?
연꽃봉오리 터뜨리자마자
청향(淸香)을 흩뿌리고
선명한 빛깔로
범상치 않게 있고녀

우습다 모란이여!
수승한 이름을 훔치다니
저 사람들에게 진항 향내를 풍겨
기어이 화왕(花王)이 되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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