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3호(2014년 6월 5일자) 특강

영산재에서의 착복무·바라무·법고무·타주무의 연원과 그 의미는?

바라무 - ‘대비주’나 ‘사다라니’를 지송할 때 곁들이는 박자와 바라를 사용한 율동은 다라니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보조 수단
선완중긴(先緩中緊)은 섭용귀체(攝用歸體)로서 自利를, 중긴후완(中緊後緩)은 종체기용(從體起用)이니 利他를 표현 - 법고무

작법무(作法舞)의 종류와 의의

6월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리는 현충일이 들어있다. 서울 삼각산 봉원사에서는 매년 이날을 기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영산재’를 시연해오고 있다. 굳이 이 날을 택한 것은 영산재 전승 현황에 대한 점검과 더불어 호국영령님들의 넋을 기리려 함이라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무엇보다 사부대중과의 공감대 조성이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한 대목이라도 진지하게 살피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많은 사람이 흥미로워하는 착복무(着服舞) 등 4종 작법무(作法舞)의 연원과 의의를 살펴 주최 측의 의도에 일조코자 한다.

착복무(着服舞)와 장수천(長壽天)

불교에서 말하는 ‘천(天)’은 하늘나라를 가리킨다기보다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말한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경우 방송의 수가 많음에도 서로 방해받지 않는 것은 각기 정해진 주파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천(天)’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다.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28개의 天을 말하고 있다.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天에서 누리는 업과 수명은 각기 다르다.
가장 긴 수명을 누리는 곳은 색계의 네 번째인 무상천(無想天)으로 무려 5백 대겁(大劫)을 산다. 그래서 이 곳을 ‘장수천(長壽天)’이라고도 부른다.
오래 사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인 것 같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팔난(八難)’ 가운데는 장수천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너무 오래 살다보면 무상을 실감하지 못해 오히려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뿐만 아니라 매사에 식상해서 특별히 흥미를 느낄만한 것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런 장수천인에게도 늘 새로운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불법이다. 아전인수격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불법은 진리요,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 것이기에 식상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이 베풀어지는 자리면 장수천인이 언제나 환희로운 마음으로 동참하여 율동으로써 찬탄한다.
한편 장수천인의 외적 특징은 의복에도 있는데, 의복인 가사(袈裟)의 무게는 육수(六銖) 즉, 9.375g에 불과하다. 이 가사를 입고 거행하는 특징이 있기에 이때의 작법무를 ‘착복무’라 부른다. 또 장수천인의 역할이 소중한 것은, 영산회상의 다보여래께서 그러셨듯 그들의 동참이 만고의 진리가 당법회에서 베풀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바라무(鉢라舞)와 알리바바

바라무는 승가에서 바라(鉢라)를 사용해 거행하는 작법무다. 그런데 정작 ‘바라’는 춤추는데 사용하는 무구(舞具)가 아니라 소리를 내는 악기다. 재료는 놋쇠이고 지름은 약 36~38㎝로 심벌즈 형태를 하고 있다.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에 구멍을 내어 그곳에 끈을 달아 손목에 감아쥐고 악기의 입술에 해당하는 부분을 부딪쳐 소리를 낸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하면 부처님께 향을 올릴 때, 설법할 때, 다비식 및 주지 진산식이 있을 때 사용한다고 하였다.
바라무는 태징으로 울리는 빠른 박자와 이에 따른 춤사위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사물과 태평소의 다소 요란한 소리 등이 주는 느낌 때문에 남성적인 춤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바라무를 담당한 스님은 정해진 장소로 나가 바라에 부착된 끈을 이용하여 양손에 한 짝씩 감아든다. 어산(魚山)에서 울리는 태징 박자에 맞춰 바라를 함께 머리 위로 들어 올리거나 내리고 때로는 교차시켜가며 거행한다.
요잡바라(繞잡바라)에서와 같이 가사(歌詞) 없이 거행하는 경우도 있고, 진언이나 다라니를 가사로 하여 거행하기도 한다. 요잡바라는 환희로움을 나타내는 율동이다. 연극에서 하나의 ‘장(場)’이 원만히 끝나야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듯 법요도 그와 같다. 따라서 법요의 한 마디가 원만히 성취되었을 때, 그에 따른 환희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요잡바라이다.
한편, 천수바라나 사다라니바라 등은 다라니나 진언을 가사로 하여 거행하는데, 이는 게송(偈頌)을 가사로 거행하는 착복무와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면 왜 다라니나 진언을 가사로 하는지, 그리고 왜 이때 바라무를 거행하는지, 여기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면 바라무의 연원이나 의의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깊어질 것이다.
다라니나 진언은 ‘약속된 언어’로서 이를 사용하는 의식은 일종의 ‘기계적 시스템’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보듯 약속된 언어는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비주(大悲呪)’나 ‘사다라니(四陀羅尼)’를 지송할 때 곁들이는 박자와 바라를 사용한 율동은 다라니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보조 수단이다. 그래서 길이가 짧고 오류의 위험도가 적은 진언이나 주(呪)에는 율동이 없다.

법고무(法鼓舞)와 환희고(歡喜鼓)

대부분의 작법무는 매우 절제된 가운데 거행한다. 앞서 살핀 착복무나 바라무는 기(氣)를 단전에 모으고 시선은 코끝에 두며, 귀와 어깨가 수직선상에 놓이게 한 상태에서 거행한다. 즉, 좌선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보면 된다. 이에 비해 법고무에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 오히려 매우 활기차고 분방한 가운데 거행되는 파격을 볼 수 있다.
가비라국 정반왕의 왕비 마야부인께서는 산달이 되어 친정으로 가시던 중, 룸비니공원에서 해산을 하시게 된다. 장차 삼계의 대도사가 되실 싯달타 태자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인솔책임자인 신하 마하나마는 이 소식을 왕에게 전하기 위해 한달음에 가비라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왕의 거취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문루에 설치돼있는 북으로 달려가 힘껏 두드렸다. 이 북은 백성 가운데 누구라도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사실을 널리 알려 기쁨을 나누기 위해 정반왕이 문루에 설치해 놓은 것으로 그 이름은 ‘환희고(歡喜鼓↔申聞鼓)’였다.
어느 때보다 힘찬 북소리를 들은 왕이 나타나 북을 울린 연유를 물었다. 마하나마는 태자의 탄생을 아뢰었다.
정리하자면 ‘법고무’는, 태자의 탄생만큼이나 환희로운 일이 있을 때 마하나마가 환희고를 두드렸듯 법고를 울리며 거행하는 작법무를 말한다.
법고무는 대충 7~8분 정도 이어진다. 춤사위가 특이해서 처음에는 천천히 울리다 점차 빠른 속도로 거행한다.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르면 다시 속도를 조금씩 늦추어 시작에서처럼 천천히 울리며 마무리한다. 즉, ‘선완중긴(先緩中緊)’과 ‘중긴후완(中緊後緩)’의 형태다.
‘선완중긴(先緩中緊)’은 섭용귀체(攝用歸體)로서 자리(自利)를 나타냄이고, ‘중긴후완(中緊後緩)’은 종체기용(從體起用)이니 이타(利他)를 나타냄이다. 석존께서 중생을 위해 사바세계에 머무시며 보이신 일대 행적인 수행과 교화의 과정을 세간중생에게 보여 일깨우는 작법이다.

타주무(打柱舞)와 백추(白槌)

영산재의 주요 구성요소인 식당작법(食堂作法)은 타사에서 초청해 모신 스님의 수가 많을 때, 대웅전 월대(月臺) 앞 넓은 공간에 스님들을 모시고 펼치는 공양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여건은 대중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때 이런 분위기를 가라 앉혀 공양을 원만히 마치게 해주는 것이 ‘백추’다.
백추는 식당작법에만 쓰이는 특이한 도구(道具)로서 고(告)한다는 의미를 지닌 지름 30㎝, 높이 50㎝ 정도의 나무뭉치다. ‘사물연기(四物緣起)’에 백추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백추는 몸체가 모두 나무이며 팔면으로서 팔정도를 나타낸다. 예전에 한 비구가 있었는데 오래도록 한 마을에 머물며 많은 신도들로부터 공양을 받았다. 목숨을 마친 후, 마을 가운데 큰 나무가 되어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고목이 되더니 급기야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버섯을 내어 마을 사람들에게 공양하였다. 그래도 그 빚을 다 갚지 못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뒤에 지혜 있는 사람이 이를 알고 그 일부를 잘라 팔면으로 다듬었다. 공양시 백추의 정상을 두드림으로써 모든 비구를 경각시켜 한 곳에 오래 머물거나 시주물에 탐착하지 않게 하였다.

즉, 백추가 식당작법을 거행하는 도량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이런 교훈 - 밥값을 하지 않고, 한 절에 오래있다 보면 요 모양 요 꼴이 된다 - 을 대중에게 고하기 위함이다. 백추의 유래를 몰랐다면 모를까 공양하는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백추는 일종의 스트레스(stress)성 도구인 셈이다.
타주무는 바로 이 백추를 중앙에 안치하고 스님 두 분이 중도(中道)의 기본인 팔정도(八正道)로부터 제법실상(諸法實相)까지 발전해 가는 수행차제(修行次第)를 보이며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는 작법무다. 이때 ‘목대기’라고도 부르는 ‘타주채(打柱寨)’로 백추를 두드리며 거행하기 때문에 작법무 거행하는 스님의 직책을 ‘타주(打柱)’라 한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공양을 마칠 즈음, 타주는 착복무를 거행하며 정각에 이른 환희로움을 나타내는데 이때 백추를 발로 차서 쓰러트린다. 이는 뗏목과 같은 교법수행의 단계를 초월해서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금강경>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서 “그대들 비구는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은 줄로 알라고 하였나니,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겠거든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느냐?!(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라 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인 대목이라 하겠다.
6월 6일 영산재 시연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님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비명에 가신 영가님들께서는 왕생극락하시며, 사부대중은 나름의 소원을 성취하시는 뜻 깊은 하루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법무의 종류와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만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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