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2호(2014년 5월 2일자) 봉축칼럼

“다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부처님께서 ‘사바(裟婆)의 악세계(惡世界)’에 원해서 오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인간의 몸을 받아 다행히도 부처님 법까지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이러한 행운이 없습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가운데 몇 번이나 이 행운을 만났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행운을 우리가 만났으니 부디 빨리 부처의 몸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다짐입니다”


진묵겁전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이
위도중생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이라.
외외덕상월륜만(嵬嵬德相月輪滿)하여
어삼계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라.
진묵겁 전에 일찍 부처되신 분이
중생제도를 위하여 세간에 나투셨네.
덕 높으신 상호는 보름달 같이 원만하시니
삼계에 큰 스승이 되셨습니다.

사월이라 초파일, 다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았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탄생하시어 출가와 고행, 성불과 교화의 일생을 통해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들이 이날을 기념하여 기뻐하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이 단지 부처님 당신의 일로만 끝나지 않고 일체 생명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임을 바로 당신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처님 오신날’ 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오신 날인 동시에 일체의 생명있는 모든 존재들이 비로소 그 구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날입니다. 이날이야말로 중생이 진정한 생명으로서 태어난 날이고 바로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알게 된 날인 것입니다.
진묵겁전(塵墨劫前), 즉, 이 세상을 다 갈아서 먼지로 만들어 그 먼지 알갱이 숫자만큼 많은 겁의 세월 이전에 벌써 부처의 몸을 이루신 분이 이 사바세계에 오셨으니 그것은 오로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중생제도가 목적입니다. 그것만이 부처님께서 오신 유일한 목적이지요.
<법화경> ‘방편품’ 에서는 ‘제불출현(諸佛出現)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출현하시는 목적을 석가모니 당신께서 분명하게 설하고 계십니다. 즉,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다만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니’라고 하신 후, ‘그 한 가지 큰 인연이란, 첫째,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열어(開) 청정을 얻도록 함이며, 둘째,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이고자(示) 함이며, 셋째,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도록(悟) 함이며, 넷째,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에 들도록(入) 함이니라’ 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불지견’이란 ‘부처님의 지혜’를 의미합니다만, 이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눈’을 가리킨다고도 하겠습니다. 즉, 지(知)는 불심(佛心)이고, 견(見)은 불안(佛眼)입니다. 불지견이란 부처님 그 자체입니다. 불지견의 개, 시, 오, 입이란 바로 ‘부처의 길을 열어 보이시고 깨닫게 하며 나아가 그 세계에 들도록’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목적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이미 부처의 몸을 이루셨으나 중생제도를 위하여 사바세계에 화신으로 오셨습니다. 사바세계는 예토(穢土)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땅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세계를 묘사해 ‘모든 부처님은 오탁악세에 출현하시니 소위 겁탁(劫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견탁(見濁), 명탁(命濁)이 그것이니라.’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겁탁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이 세계가 흐리다는 것이니 세계의 곳곳에 일어나는 재난이나 기근, 그리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갖가지 병이 창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번뇌탁이란 중생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을 가리키니 온갖 대상에 집착하고 탐욕심을 내며 나와 내 것이란 상에 집착하여 인색하기만 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중생탁은 누구나가 스스로 중생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만 만족하고 있는 모습을, 견탁이란 이 세상에 삿된 견해와 악한 사상들이 넘치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며, 명탁이란 사바세계 중생들의 수명이 극히 짧음을 의미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런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일컬어 ‘중생들은 허물이 많아 아끼고, 과하게 취하며, 시기하고, 샘내나니 그리하여 모든 선하지 못한 근본을 이룬다.’ 라고 설합니다. 부처님께서 굳이 이러한 세상에 출현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의 중생을 측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생들이 탁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의 종류는 약 150만 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람도 그 생물 가운데의 하나인 이상, 그것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은 150만 분의 1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여성의 몸 안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사람의 생명으로 잉태할 수 있는 것은 1조분의 1의 확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큰 행운입니다. 150만 분의 1, 나아가 1조 분의 1의 확률을 극복하고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기 어려운 것을 초기경전에서는 ‘맹구부목(盲龜浮木)’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번씩 바다위로 떠오르는데 우연히도 역시 그 넓은 바다에 떠다니던 단 하나의 판자, 그것도 그 판자에 나 있는 구멍으로 거북이 머리를 들이 밀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어렵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상상할 수도 없이 어렵겠지요. 그런데 경전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그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손끝으로 흙을 찍어 올리시면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 손끝에 묻은 흙이 많은가, 대지의 흙이 많은가?” 당연히 제자들은 대지의 흙이 많다고 대답했지요. 이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생류(生類)의 대지에 있어서 사람의 숫자는 내 손끝의 흙보다도 적다.”
요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부디 이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 ‘불지견’에 눈을 떠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때가 윤회를 벗어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합니다. 즉, 천상세계는 너무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절절한 희구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 밖의 세계는 괴로움에 충만해 있는 관계로 제 정신을 차리고 살기 어려운데, 오직 인간계, 즉 사람의 세계만은 고(苦)와 낙(樂)이 적절하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부처님께서 ‘사바(裟婆)의 악세계(惡世界)’에 원해서 오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인간의 몸을 받아 다행히도 부처님 법까지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이러한 행운이 없습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가운데 몇 번이나 이 행운을 만났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행운을 우리가 만났으니 부디 빨리 부처의 몸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다짐입니다.

삼계를 윤회함이 마치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것과 같아서
백천만겁을 지나옴이 미진과 같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떤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요.

아침 종성에 나오는 게송 한 구절입니다. 불자 여러분, 이 삶을 소중히 하여 모두 빨리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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