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소설가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보성 봇재 너머에 차밭을 가지고 있는 지인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지인은 전라도 일대의 차밭 대부분이 동해를 입어 차나무들이 붉게 고사해 버렸다고 한해 차농사를 걱정했다.
곡우 전후에 따는 우전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세작은 초여름에나 미미한 수확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내 산방의 차밭 차나무들도 열 나무 중 한 그루쯤 동해를 입은 해였다. 그래도 피해가 적은 까닭은 2, 3년 동안 찻잎을 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야성을 키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수확량에 매달리는 성과주의자들에게는 온당치 않은 얘기겠지만 나의 의도적인 게으름을 탓할 일만은 아닌 셈이 되었다. 쓸데없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이 결과적으로 차나무들의 생명을 보존했으니까.

보성의 그 지인은 죽은 차나무들을 위해 재(齋)라도 지내야겠다고 했는데, 그런 의식을 치렀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죽은 차나무들을 위해 극락왕생하도록 재를 지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 아닐까도 싶다.

가슴 아프기는 나도 그 지인과 다르지 않았다. 순천과 하동으로 ‘차나들이’를 다니면서 낙담해 하는 차밭의 주인들을 여러 명 만났던 것이다.

여기서 ‘차나들이’라 함은 국어사전에는 없으나 내가 지어 사용하는 말이다. 봄나들이를 하듯 해가 바뀌면 햇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기 위해 당일치기로 외출하는데, 나는 그것을 차나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차나들이 중에 차회(茶會)를 갖기도 하여 돌아가면서 시를 지어 차맛을 더 의미 있게 하는 날도 있는데,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옛 선비나 고승들이 향유해 왔던 전통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나도 하동 먹점골 매화꽃 그늘에서 폈던 차회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절로 초의선사 시가 외워졌다.

찻물 끓는 대숲소리 솔바람소리 쓸쓸하고 청량하니
맑고 찬 기운 뼈에 스미어 마음을 깨워주네
흰 구름 밝은 달 청해 두 손님 되니
도인의 찻자리 이것이 빼어난 경지라네.

참고로 나는 내 이마에 땀이 돋게 하는 차를 명차로 간주하는 습관이 있다. 좋은 차만 마시면 이마에 땀이 돋고 그동안 쌓인 피로가 봄 햇살에 잔설이 녹듯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잡사에 시달렸던 심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짐은 물론인데 이때의 차란 명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나는 다인과 차인을 구분해서 부른다. 차를 기호식품 차원에서 즐겨 마시는 사람을 차인이라 부르고, 차를 징검다리 삼아 보다 높은 정신적인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마시는 사람을 다인으로 부르는 것이다.

차의 어원을 근거로 해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있지만 동조하는 분도 많아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다인과 차인을 구분하고 있다.

실제로 고운 최치원 같은 분이나 신라 성덕왕 때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보살이 된 우리나라 최초로 다시(茶詩)를 쓴 김교각 지장스님을 차인으로 부르기에는 격을 낮추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차 한 잔에 성리학의 도학사상을 담아낸 다부(茶父)로 불리던 한재 이목(李穆) 선생이나 차를 마시며 어찌 진리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 라고 꾸짖었던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를 차인으로 부르기보다는 다인으로 불러야 왠지 불경스럽지 않는 것이다. 작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도 마찬가지다.

스님께서는 내게 ‘세상에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주신 분이다. 문득, 스님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무염거사, 다른 욕심은 다 정리했어요. 그런데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만큼은 잘 놓아지지가 않아요.”
평생 무소유를 말씀하신 스님께서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만은 어쩔 수 없다는 인간적인 고백이시었다. 실제로 스님께서 차와 찻잔 색깔과 모양, 혹은 차로 인한 내면의 충만에 대해 얘기하시는 동안에는 스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과 심미안(審美眼)이 절로 느껴졌다.
“최고의 차맛은 홀로 마시면서 음미하는 적적한 맛이지.”

좋은 찻잔에 담긴 차 한 잔의 맛과 향에 자족하는 노승의 모습. 깨달음의 실존이 있다면 바로 그런 ‘텅 빈 충만’을 즐기는 스님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경지에 오른 스님을 어찌 다인이자 다승(茶僧)으로 존경하기를 주저할 것인가.

그동안 한중일 삼국을 소설이나 산문을 쓰기 위해 취재차 답사를 다니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도 차를 대하는 우리와 그들의 의식구조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었다. 다도(茶道)를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방법’으로, 일본은 ‘차를 마시는 예술’로, 우리는 그들보다 한 단계 차원을 높여 정신수양으로 여기는 전통문화가 있어 왔다는 차이였다.

차 마시는 이들이 왜 참됨을 따르고 속됨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리고 차회나 차나들이 등의 낭만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차 마시는 인구가 불어나고 있는 지금이 바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만의 맑고 향기로운 차문화 전통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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