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방하착(放下着) - 욕심쟁이 원숭이를 비웃을 수 있는 자격

‘사랑과 전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All is fair in love and war)’는 말이 있다. 사랑과 전쟁에서 패한 자의 비참함이 그만큼 큰데서 나온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독일에서 생긴 일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청년 역시 패전의 피해자로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다행히 동물원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되었다. 동물원이라고는 해도 정작 동물들의 우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전란 중에 대부분 아사(餓死)하거나 질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첫 출근을 하며 청년은 자신에게 맡겨질 일이 동물들의 사료를 주거나 분뇨를 치우는 일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 청년 앞에 담당자는 큼지막한 보따리를 하나 내놓았다. 곰 가죽이었다. 곰을 구해올 때까지 이것을 쓰고 곰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다 구경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우리 안에 누워서 잠만 자면 되는 그런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낮잠을 즐기는 그의 귀에 재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유치원 어린이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교육은 백년지계(百年之計)라더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새싹들을 위한 교육에만큼은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청년이 있는 곰 우리 쪽으로 왔다. 청년도 뭐처럼 일거리가 생겼다싶어 애들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곰처럼…. 애들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라했다. 청년도 신이 났다. 내친김에 울타리 안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팬 서비스였다.

하지만 즐겁고 신이 난 것도 거기까지, 실수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 떨어진 그곳은 호랑이 우리였다. 아까부터 곰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호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 쪽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아뜩했다. 본능적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용이치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지퍼를 내리고 가죽을 벗으려 했으나 급하다보니 땀만 비 오듯 했지 지퍼조차 잘 잡히질 않았다. 호랑이는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아! 이제는…’ 하고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때였다.
“여보게, 너무 애쓰지 말게. 나도 사람일세.”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호랑이 역시 호랑이 가죽을 쓰고 흉내만 내고 있던 누군가였다. 이 이야기는 개신교 신학자이자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총장을 지낸 헬무트 틸리케(1908~1986)씨가 겪은 일이라고 한다.

사람이지만 곰의 역할이 주어지면 곰 노릇을 하고, 호랑이의 역할을 맡기면 호랑이 흉내를 낸다. 남자에게 여자 역할을 주어 무대에 오르게 하면 행동이나 목소리는 물론 마음까지도 여성스럽게 변한다.
일례로 연극배우나 영화배우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다보면 성격도 변할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작품이 끝난 뒤 자신의 본래 위치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심한 경우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의 불성(佛性)에는 애초부터 남녀노소나 존비귀천 등 어떤 차별도 없다는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불성!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로서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말씀은 <화엄경>의 중심사상이기도 하고, <열반경>에 나오는 것으로서 장차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근간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에 의지컨대 지금의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부처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모습이 부처님의 상호인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에 가장 접근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생긴 값만 해도 반 성불(半成佛)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는 원숭이를 잡는 비법이 있다. 커다란 나무 상자를 만들어 놓고,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몇 개 뚫어 놓는다. 상자 안에는 망고나 바나나같이 원숭이가 탐낼만한 과일을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
과일의 아름다운 냄새에 사로잡힌 원숭이는 탐색을 끝낸 후, 손을 상자 안으로 넣어 과일을 움켜쥔다. 싱겁지만 원숭이 포획작전은 이로써 끝났다. 상자의 구멍은 원숭이가 과일을 쥔 채 손을 빼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다가가면 원숭이는 물론 달아나려 한다. 그러자면 손에 쥐고 있는 과일을 내려놓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원숭이는 과일을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방하착(放下着)’의 도리를 모르는 욕심이 결국 스스로를 잡히게 하고 만다.

망연(妄緣)! 원숭이에게는 과일이 망연이고, 우리에게는 아만(我慢)이 망연이다. 사대(四大)·육진(六塵)·심식(心識)이 곧 아만의 실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도 그렇다. 이런 것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않으면 무상살귀(無常殺鬼)에 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랬듯 삼계육도라는 상자에 손목을 잡힌 채 끊임없이 윤회라는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안타깝지만 과일을 버리지 못하는 원숭이를 비웃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보살도 경계해야하는 것이 타성

<대장엄경론(大莊嚴經論)>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모든 사람은 마땅히 알라. 사람의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며, 눈·코·귀·입·몸·마음 등을 제대로 갖추기 어렵고, 신심을 내기 어려우니, 이 하나 하나의 일이 만나기 어려움을 비유하면 눈먼 거북이가 뗏목 가운데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느니라(諸人當知 人身難得 佛法難値 諸根難具 信心難生 此一一事皆難値遇 譬如盲龜値浮木孔).

정말이지 이런 이치를 아는 것만 해도 참으로 고맙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새장에 갇혀 살던 새는 문을 열어줘도 날아가려 하지 않는다. 타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타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음 여래의 장자(長子)이시며 법계의 원왕(願王)으로서 만행(萬行)이 무궁하신 보현보살님에 얽힌 일화에서 공감대를 찾아보고자 소개한다.

한때, 보현보살께서 백색 암퇘지 몸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연처를 찾아 백운(白雲)처럼 둥둥 떠다니셨다. 그러다 어떤 촌락에 정착하여 많은 새끼를 낳아 사람들로 하여금 보살신(菩薩身)을 친견하고 제도 받을 인연을 짓도록 하고 계셨다.

그때 어느 산중 절에 비구의 몸으로 수행을 하시던 청산(靑山) 문수보살께서 이를 가련케 여기셨다. 마침 스님 한 분이 그 촌락을 지나간다고 하여, 문수보살께서는 편지를 한 통 써주시며 ‘가지고 가다 그 돼지우리 안에 있는 암퇘지에게 건네주라’고 부탁하셨다.

돼지에게 편지를 전해주라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왠지 흥미롭기도 해서 그러마고 했다. 그 마을을 지나다보니 정말 돼지우리가 있고 백색 암퇘지도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내밀어 보였다. 돼지는 누어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가 편지를 보자 벌떡 일어나 다가와서는 그 편지를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벌렁 자빠지더니 네 다리를 하늘로 뻗은 채 죽어버렸다.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광경의 시종을 지켜보던 주인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주인은 돼지에게 못 먹일 것을 먹인 것으로 오해하고 스님을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관가로 끌고 갈 기세였다. 열심히 변명했지만 통하질 않았다. 급기야 스님은 돼지 값을 치르기로 하고 돼지의 배를 갈라보자고 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였다. 주인도 동의했다. 배를 갈라보니 돼지의 위 속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나왔다. 내용인즉,

久在塵勞中(구재진로중)
오래 진로(塵勞=번뇌) 가운데 있으면
昧却本來身(매각본래신)
본래의 청정신을 망각하기 쉬우니,
今朝收萬行(금조수만행)
오늘 아침 만행(萬行)을 거두고
速還靑山來(속환청산래)
어서 속히 청산으로 돌아오시오.

이 일화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율이상(經律異相)>에서 말씀하는 십이지(十二支)에서처럼 대승보살이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는 사람은 물론이요 축생의 몸까지 받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상(人相)을 경계하신 것이다.

부연하면 비천해 보이는 중생일지라도 불성에는 차별이 없으므로 육도중생 모두를 보살의 화신으로 보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보현보살의 행은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의 그것을 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만큼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 타성임을 강조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호랑이같은 선지식을 찾으러…

이쯤에서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게송을 통해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

若人欲識佛境界(약인욕식불경계)
누구라도 부처경계 짐작하길 바란다면
當淨其意如虛空(당정기의여허공)
당연할사 그마음을 허공같이 비울지라.
遠離妄想及諸趣(원리망상급제취)
망상이며 모든 취향 멀리멀리 여의어서
令心所向皆無애(영심소향개무애)
어디에도 걸릴 바가 없어야만 하느니라.

그렇다, 이 말씀과 같으려면 청년 ‘틸리케’처럼 무서운 호랑이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위기의식을 느끼고 뒤집어쓰고 있는 가죽을 벗어 동댕이치려 할 것이다. 호랑이는 선지식이다. 그리고 그 선지식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조사들은 호랑이같은 선지식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찾고자 천하를 주유했던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이 보다 더 큰 대박은 없다. 타성을 경계하는 한편 부디 생긴 값을 해야 한다. 아니 그 껍데기조차도 벗어버려야 한다. 원숭이를 비웃을 여가가 없다.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