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그 들뜸만 늘어나고, 너무 느슨하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평등하게 닦고 익히고 거두어 받아, 집착하지도 방일하지도 말며 모양을 취하지도 말라

“이 경의 끝부분에서 붓다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소나의 태도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추켜세우지도 않고 또한 남을 낮추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명확히 설명했다. 모든 비구들도 이렇게 분명하게 법을 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이런 사람들은 붓다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경의 교훈은 여기에 있다”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원문]
(二五四)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者二十億耳住耆도山, 常精勤修習菩提分法. (중략)
佛告二十億耳: “精進太急, 增其掉悔, 精進太緩, 令人懈怠, 是故汝當平等修習攝受, 莫著·莫放逸·莫取相.” 時, 尊者二十億耳聞佛所說, 歡喜隨喜, 作禮而去. 時, 尊者二十億耳常念世尊說彈琴譬, 獨靜禪思. 如上所說, 乃至漏盡心得解脫, 成阿羅漢.
爾時, 尊者二十億耳得阿羅漢, 內覺解脫喜樂, 作是念: ‘我今應往問訊世尊.’ 爾時, 尊者二十億耳往詣佛所, 稽首禮足, 退坐一面, 白佛言: “世尊! 於世尊法中得阿羅漢, 盡諸有漏, 所作已作, 捨離重擔, 逮得己利, 盡諸有結, 正智心解脫, 當於爾時解脫六處. 云何위六? 離欲解脫·離에解脫·遠離解脫·愛盡解脫·諸取解脫·心不忘念解脫. 世尊! 若有依少信心而言離欲解脫, 此非所應, 貪·에·癡盡, 是名진實離欲解脫. 若復有人依少持戒而言我得離에解脫, 此亦不應, 貪·에·癡盡, 是名진實解脫. 若復有人依於修習利養遠離而言遠離解脫, 是亦不應, 貪·에·癡盡, 是진實遠離解脫. 貪·에·癡盡, 亦名離愛, 亦名離取, 亦名離忘念解脫. 如是, 世尊! 若諸比丘未得羅漢, 未盡諸漏, 於此六處不得解脫. 若復比丘在於學地, 未得增上樂, 涅槃習向心住, 爾時成就學戒, 成就學根, 後時當得漏盡·無漏心解脫, 乃至自知不受後有. 當於爾時得無學戒, 得無學諸根. 譬如영童愚小仰臥, 爾時成就童子諸根, 彼於後時漸漸增長, 諸根成就, 當於爾時成就長者諸根, 在學地者亦復如是. 未得增上安樂, 乃至成就無學戒·無學諸根. 若眼常識色, 終不能妨心解脫·慧解脫, 意堅住故, 內修無量善解脫, 觀察生滅, 乃至無常. 耳識聲·鼻識香·舌識味·身識觸·意識法, 不能妨心解脫·慧解脫, 意堅住故, 內修無量善解脫, 觀察生滅. 譬如村邑近大石山, 不斷·不壞·不穿, 一向厚密, 假使四方風吹, 不能動搖·不能穿過, 彼無學者亦復如是. 眼常識色, 乃至意常識法, 不能妨心解脫·慧解脫, 意堅住故, 內修無量善解脫, 觀察生滅.” 爾時, 二十億耳重說偈言: “離欲心解脫, 無에脫亦然, 遠離心解脫, 貪愛永無餘. 諸取心解脫, 及意不忘念, 曉了入處生, 於彼心解脫. 彼心解脫者, 比丘意止息, 諸所作已作, 更不作所作. 猶如大石山, 四風不能動. 色聲香味觸, 及法之好惡, 六入處常對, 不能動其心. 心常住堅固, 諦觀法生滅.” 尊者二十億耳說是法時, 大師心悅, 諸多聞梵行者聞尊者二十億耳所說, 皆大歡喜. 爾時, 尊者二十億耳聞佛說法, 歡喜隨喜, 作禮而去. 爾時, 世尊知二十億耳去不久, 告諸比丘: “善心解脫者, 應如是記說, 如二十億耳以智記說, 亦不自거, 亦不下他, 正說其義; 非如增上慢者, 不得其義, 而自稱歎得過人法, 自取損減.”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이십억이(二十億耳)는 기사굴산(耆사굴山)에서 항상 부지런히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고 익히고 있었다. (중략)
부처님께서 이십억이에게 말씀하셨다.
“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그 들뜸[掉悔]만 늘어나고, 정진이 너무 느슨하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평등하게 닦고 익히고 거두어 받아,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며 모양을 취하지도 말라.”
이때 존자 이십억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때 존자 이십억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항상 생각하면서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홀로 고요한 곳에서 선정에 들어 사색하였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 끊어지고 마음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때 존자 이십억이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이 해탈한 기쁨과 즐거움을 깨닫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꼭 세존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리라.’ 그때 존자 이십억이는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법 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漏]가 다 끊어졌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제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모든 존재[有]의 결박을 다 풀었고 바른 지혜로 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 그때 여섯 가지에서 해탈하였으니, 어떤 것이 그 여섯 가지인가? 즉 탐욕을 여읜 해탈[離欲解脫]·성냄을 여읜 해탈[離에解脫]·멀리 여읜 해탈[遠離解脫]·애욕이 다한 해탈[愛盡解脫]·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해탈[諸取解脫]·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해탈[心不忘念解脫]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조그마한 신심(信心)을 의지하여 ‘탐욕을 여의고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탐욕을 여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계율을 조금 지키는 것에 의지하여 ‘나는 성냄에서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익을 멀리 여의기를 닦아 익힌 것을 의지하여 ‘멀리 여의어서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로 멀리 여읜 해탈이라고 합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애욕을 여읜 것이라고 하고, 또한 집착을 여읜 것이라고 하며, 또한 기억을 잊어버림에서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어떤 비구든 만일 아라한이 되지 못하여 모든 번뇌를 다 끊지 못했다면, 이 여섯 가지에서 해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만일 어떤 비구가 배우는 위치에 있어서 아직 증상(增上)한 즐거움의 열반(涅槃)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익히고 향하는 마음에 머무른다면, 그때 그는 배우는 자의 계[學戒]를 성취하고 배우는 자의 근[學根]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뒷날에는 반드시 번뇌가 다 없어져 마음이 해탈하며, … 나아가 후세(後世)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때를 당하여 배울 것이 없는 자의 계[無學戒]를 얻고, 배울 것이 없는 자의 근[無學根]을 모두 얻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어리석고 작은 어린아이가 반듯이 누워 지낼 때에는 어린아이의 모든 감각기관[根]을 성취하였고, 그가 뒷날에 점점 자라 모든 감각기관이 성취되면 그때는 어른의 모든 감각기관을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는 지위에 있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아직 왕성한 안락은 얻지 못하였지만, … 나아가 배울 것이 없는 자의 계와 배울 것이 없는 자의 모든 감관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혹 눈으로 항상 빛깔을 분별하더라도 끝내 마음이 해탈(解脫)하는 것과 지혜로 해탈(解脫)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고, 생기고 사라짐에서부터 나아가 무상함까지 다 관찰합니다. 귀로 소리를 분별하고, 코로 냄새를 분별하며, 혀로 맛을 분별하고, 몸으로 감촉을 분별하며, 뜻으로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이 해탈하는 것과 지혜로 해탈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없는 좋은 해탈을 닦고, 생기고 사라짐을 관찰합니다.
비유하면 마을 가까이에 큰 돌산이 있는데, 끊기지도 않았고 부서지지도 않았으며 뚫리지도 않아 한결같이 두텁고 조밀하다면 설사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움직일 수 없고, 뚫고 지나갈 수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저 배울 것이 없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눈으로 항상 빛깔을 분별하고, … (내지) … 뜻으로 항상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이 해탈하는 것과 지혜로 해탈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없는 좋은 해탈을 닦고 생기고 사라짐을 관찰합니다.” 그때 이십억이가 거듭 게송으로 말하였다.

탐욕을 여의어 마음이 해탈하고
성냄이 없는 해탈도 또한 그러하네.
멀리 떠나 마음이 해탈하고
탐욕과 사랑도 영원히 남음 없네.
모든 집착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또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입처(入處)의 생기는 곳 환히 알아
그것에 대해 마음이 해탈하였네.

저 마음이 해탈한 사람
그 비구는 뜻이 쉬고 그치며
해야 할 모든 일 이미 마쳐
다시는 할 일을 만들지 않네.

마치 저 큰 돌산은
사방에서 부는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듯이
빛깔·소리·냄새·맛·감촉과
또 법의 좋고 나쁨을
여섯 감관이 항상 대하더라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나니
마음은 언제나 굳게 머물러
법의 생기고 사라짐을 환히 관찰하네.

존자 이십억이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스승은 마음으로 기뻐하셨고, 많이 들어 아는 모든 범행자들도 존자 이십억이의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그때 존자 이십억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그때 세존께서는 존자 이십억이가 떠나가고 그리 오래지 않아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저 이십억이가 지혜로써 분명히 말하며, 제 자신을 추켜세우지도 않고 또한 남을 낮추지도 않으며, 바르게 그 이치를 말하듯이 마땅히 이 사람처럼 분명하게 말해야 하느니라. 그것은 증상만을 가진 자가 그 이치도 얻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사람을 초월한 법을 얻었다고 자랑하여 스스로 손해 보는 것과는 같지 않느니라.”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9권 제254경(<대정장> 2, pp.62b-63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AN6:55 Sona-sutta(AN Ⅲ, pp.374-379)이다. 이 경의 제목인 ‘이십억이(二十億耳)’는 ‘소나(Sona)’를 번역한 것이다. 소나를 ‘수루나(輸屢那)’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소나의 정확한 이름은 소나 꼴리위사(Sona Kolivisa)이다. 그는 짬빠(Campa)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나는 이름이고 꼴리위사는 족성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부터 집안의 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했으며 태어나서는 아주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수쿠말라 소나(Sukhumala Sona)라고도 불렸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손과 발 등이 아주 섬세하였기(sukhumala)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한 빔비사라 왕의 초청으로 라자가하에 갔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했다.
그는 출가 후 열심히 정진했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실망하여 환속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붓다는 그것을 알고 그에게 거문고를 켜는 비유를 들어서 바른 정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이 되었다. 이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거문고의 비유에 관한 이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나중에 붓다는 그를 “열심히 정진하는 자들 가운데서 소나 꼴리위사가 으뜸이다”(A1:14:2-9)라고 칭찬했다.
여기에서 생략한 부분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소나가 출가하여 열심히 정진했으나 모든 번뇌를 다 끊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오욕 (五欲)을 즐기면서 널리 보시나 행하여 복이나 짓자’ 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소나의 마음을 간파한 붓다는 거문고 줄을 너무 조여도 너무 느슨하게 해도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수행도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나태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일깨워주었다.
이 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거문고에 비유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소나가 열심히 정진한 결과 드디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원래의 소나경이다. 후반부는 소나가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나서 붓다께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후반부의 내용은 전반부와 전혀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경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편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실린 소나숫따(Sona-sutta)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대만에서 발행되는 <잡아함경>에서는 전반부만 수록하고 있다.
이 경의 끝부분에서 붓다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소나의 태도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추켜세우지도 않고 또한 남을 낮추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명확히 설명했다. 모든 비구들도 이렇게 분명하게 법을 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이런 사람들은 붓다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경의 교훈은 여기에 있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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