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완/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

지금까지는 불탑과 사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만큼 불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을 때에만 그 의미가 성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그 진신사리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따라서 인도에서 온 승려가 어렵게 진신사리를 구해오거나, 혹은 까마득한 오래 전에 아쇼카왕이 만든 8만4천개의 탑 중에 일부가 중국에 세워져서 그 탑 안에서 진신사리를 발굴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들이 불탑에 모실 진신사리에 대한 진정성을 주장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런데 급기야 나중에는 신심을 다해 기도했더니 하늘이 감응하여 진신사리를 내려주었다느니, 혹은 생선을 먹는데, 그 생선 뱃속에서 진신사리가 나왔다느니 하여 진신사리에 대한 전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한 전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렇게 생겨난 진신사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리에 대한 신비감을 반감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럴 즈음에 동아시아의 불교도들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게 되었던 것 같다. 인도로부터 온 승려들에 의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점차 동아시아의 구법승들이 인도에 직접 방문하여 들리게 된 그 구심점은 보드가야, 즉 석가모니가 성도를 이룬 성지에 세워진 마하보디 사원이었다. ‘마하’ 즉 ‘크다(大)’는 뜻과 ‘보디’ 즉 ‘깨달음(覺)’의 뜻으로 ‘대각사’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성지를 방문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손오공이 활약하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현장법사가 있었고, 우리나라의 혜초도 그곳을 직접 방문하여 그 감격을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마하보디 사원 안에는 그들에 의해 대탑(大塔), 즉 위대한 탑으로 불린 건축물이 있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성도를 이룬 보리수 아래의 금강대좌 바로 앞에 세워진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이름에 붙여진 ‘탑’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그 안에는 사리가 봉안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께서 성도를 이루셨을 때의 모습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건축물은 엄밀히 말하면 탑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마하보디 대탑은 오히려 힌두교 건축의 신전건축양식에 가깝다. 그 중에서도 인도 남쪽 지역에서 유행한 신전건축에 가까운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대탑은 19세기에 버마의 불교도들이 재건한 건축이기 때문에 남인도 힌두사원 건축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 양식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물게 남아있는 고대의 마하보디 대탑이 새겨진 유물들을 보면 역시 기본 골격은 힌두교 신전건축에 가까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진신사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석가모니의 위대한 행적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불교도의 성지가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동아시아 불교도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물질적인 숭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석가모니께서 성도를 이룬 장소는 인도였지 중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신사리라고 하는 물질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를 옮겨오는 것보다는 특정한 장소가 지니는 상징성을 옮겨오는 것이 보다 간편한 일이었다.

흔히 ‘불국토’라고 하는 개념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지명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불교적 성격의 지명들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어 강원도 양양 낙산은 인도의 포탈라카산을 옮겨온 개념이고,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은 인도의 영축산인 그리드라쿠타산을 옮겨온 개념이다. 오대산, 금강산 등도 모두 불교적 상징성을 지닌 인도의 특정장소를 우리나라로 옮겨온 것이다.

아마도 보드가야의 위대한 장소성을 본격적으로 중국으로 이식한 사람은 현장법사가 아닌가 한다. 그가 17년간의 인도 순례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세운 장안의 자은사 대안탑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탑과는 전혀 다른 사각형 평면을 지닌 고층누각식의 건축이었다. 원래 목탑이었는데 후대에 지금과 같은 전탑으로 변형된 것이다. 사실 마하보디 대탑도 아쇼카왕 시절에는 목탑이었다가 후대에 지금과 같은 석조조형물로 바뀐 것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사각형 평면에 고층누각식 조형성은 두 건축이 서로 유사한 형태에서 출발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현장법사는 마하보디 대탑 안에 봉안된 석가모니 성도상의 크기를 측정해올 정도로 이 보드가야 대탑을 중국에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이제 더 이상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은 상자가 아니었다.

불탑은 인도의 성지를 중국으로 옮겨왔다는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고, 그 안에는 진신사리 뿐 아니라 석가모니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께서 성도를 이룰 때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 석가모니의 말씀인 경전 등 불·법·승 삼보(三寶)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점차 탑 안에 봉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이른 시기의 탑이 분황사 모전석탑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재는 3층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원래는 9층에 달하는 높은 탑이었고, 그 형태를 복원해 보면 자은사의 대안탑과 유사한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되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대안탑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이 당나라로 귀국하여 대안탑을 세웠던 시기보다도 10년 이상 먼저 세워진 것이 된다. 따라서 마하보디 사당을 동아시아로 이식하려던 시도가 중국보다 더 빨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신라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과연 이 탑이 정말로 분황사 창건기에 함께 세워진 것인지에 대해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여하간 이 시기를 즈음하여 불탑은 더 이상 진신사리라는 물질성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탑은 보드가야에서의 석가모니의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고, 따라서 “깨달은 자”, 즉 “붓다”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물질성 숭배에서 상징성 숭배로 불교의례가 변화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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