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명/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내가 보는 불교’라는 제목으로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불교란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런데 ‘내가 보는’ ‘부처님 가르침’이 따로 있을까라는 의문부터, ‘부처님 가르침’으로는 ‘나’라는 것이 ‘따로 없을텐데’ 어떻게 ‘내가 보는 불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데까지 이르러 고민을 하다 보니, 도대체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 속에서는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쉽고 단순한 제목은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아주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아주 단순하게 다시 묻는다. “내가 보는 불교’란 무엇인가?”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를 바로 보는 것’과 ‘나로 바로 사는 것’ 두 가지로 요약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다르게 표현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리를 구하는 것은 바로 ‘나를 바로 보는 것’이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바로 ‘나로 바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를 바로 보는 것’의 출발은 ‘나’는 ‘나’이상 나‘이하도 아닌 ‘나’를 ‘나’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는 참 맹랑하다. 부처님 가르침 중 무아론에 따르면, 나라는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이나, 나의 가문이나, 나의 이름이나, 나의 성별 등등의 나의 것들은 나를 가합(假合)하고 있는 비본래적인 것들이다. 본래적인 나는 인연들에 의해 임시로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어떤 시점에 내가 얻은 하나의 직업이 본래적인 나일 수는 없다. 태어난 이후 얻어진 것들로 구성된 나는 임시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이다. 죽은 이후 사라질 것들로 구성된 나도 역지 비본래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라 할 만한 어떤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얻어진 것들로 끝내는 사라질 것들이다. 얻어졌고, 또 사라질 모든 것은 따라서 본래적이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다.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인간은 오온(五蘊)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는 『잡아함경』(「금강비구니게」)에 따르면 “여러 재목이 모여서 수레가 되는 것처럼, 여러 온(蘊)이 인연화합해서 유정(有情) 중생이라는 가명(假名)이 있게 된다.”라고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 조각을 모아서 수레를 만드는 것처럼,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가 갖가지 부품으로 이루어져 하나의 자동차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인간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중생이라는 임시적인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번쩍하고 사라지는 번개와 같이 보라.”고 강조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순간적 존재의 머묾에 불과한 육체와 인식을 ‘영원한 실체로서의 나’라고 집착한다. 여기서 온갖 자기중심적 집착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인간의 고(苦)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앞에서 설명한 것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 의식을 미세하게 ‘자각하고 있는 내’가 있고, 그 미세하게 자각하는 나를 ‘최후에서 자각만 하는 최후의식’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논의 자체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최후의식’을 ‘깨어있음’이라는 말로 다시 바꾸어 써 보자. 그 ‘깨어 있음’ 자체를 ‘나’라고 하면, 인연의 가합으로 이루어진 ‘비본래적인 나’와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깨어 있는 나’는 ‘비본래적인 나’가 ‘깨져서’ ‘나’라 할 게 없는 ‘깨진 나’이며, ‘본래적인 나’가 ‘깨어난’ ‘나’이다. 나는 이를 ‘나 없는 지극한 나(無我之至我)’이며 ‘나 아닌 큰 나(不我之大我)’라고 부른다. ‘비본래적인 나’가 깨지고 ‘본래적인 나’가 깨어난 ‘나 아닌 큰 나’이자 ‘나 없는 지극한 나’는 자기중심적이랄 수 있는 중심이 없고, 그래서 자기중심적이어서 생기는 괴로움이나 고통도 없게 되는 것이다.
다음, ‘나로 바로 사는 것’의 출발이자 마지막은 ‘나 아닌 큰 나’로 사는 것이고, ‘나 없는 지극한 나’로 사는 것이 된다.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전통에서는 바로 이런 어리석음이 제거되면, 지혜가 나온다고 본다. 즉 나로 바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삼론종(三論宗)의 근본 교의인 ‘파사현정(破邪顯正)’도 같은 맥락이다. 즉 “삿된 것을 부수면 바름이 드러난다.” 혹은 “삿된 것을 부숨이 바름을 드러냄이다.” ‘파사현정’을 해석하는데 이와 같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어리석음, 무명, 삿된 것은 제거되거나 부숴야 한다. ‘마음을 비움’이 바로 파사(破邪)이다. 마음을 비워 드러나는 것은 오직 ‘비움’ 그 자체고 그것이 바로 ‘바름이 드러남’이고 ‘바름을 드러냄’이다. 숭산(1927-2004) 스님의 “오직 모를 뿐” 그리고 “오직 할 뿐”도 오직 ‘마음을 비움’에 다름 아닌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오직 모를 뿐”인 상태에서 “오직 할 뿐”이다. 매 순간마다 텅 빈 마음으로 그 일에 따라 그 마음을 그저 내서 그 일을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나 아닌 큰 나’로, ‘나 없는 지극한 나’로 사는 것의 다른 말이다.
우리가 이런 ‘나 아닌 큰 나’이며, ‘나 없는 지극한 나’가 되어 산다는 것은, 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 없는 삶은 남 없는 삶을 만든다. 남 없는 삶에서 남은 나를 남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이제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어’ ‘너 나 할 것 없는 우리’가 되어 살게 된다. 그러면, ‘너 나 할 것 없는 우리’가 ‘너 나 할 것’ 없이 ‘너 나 할 것 없는 우리’들의 세상을 만들어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모두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삶을 사는 것이고, 불국정토의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를 바로 보는 것’과 ‘나로 바로 사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 그래서 ‘나 남이 없이 우리로’ ‘그때마다 할 일을 그저 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보는 부처님 가르침이자,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가 보게 되는 부처님 가르침이어서, 따로 내가 보는 불교랄 것 없는 불교이다. 

김원명
現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 한국외국어대 인문대학 부학장 ․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학과장 ․ 불교학연구회 섭외이사, <<불교학연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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