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1호(2014년 4월 10일자) 특강

우리가 남이가 !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멈추었다고 하자
수레를 두드려야 되겠느냐? 소를 다그쳐야 하겠느냐?”

이웃종교의 일이지만, 길거리 선교사들의 자기희생적 선교활동에는 어떤 칭찬도 아깝지 않다. 대상불문, 시간불문, 장소불문, 방법불문… 정말이지 대단하다. 한 번은 스님 한 분이 표적(?)이 됐다. 다음은 선교사와 그 스님의 대담 내용이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엘 갑니다.”
“그럼 열심히 수행해도 지옥엘 갑니까?”
“물론입니다. 어쨌거나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스님도 예수를 믿어야 지옥의 유황불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옥도 갈만한 곳이겠구려.”
“무슨 말씀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열심히 수행하면 극락엘 간다’고 하셨소이다. 그런데, 당신은 지옥엘 간다고 하니, 극락과 지옥이 결국 같은 곳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지옥도 꽤 쓸만한 곳이라는 말씀이외다.”
“……”

극락과 지옥의 차이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저승엘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이 적힌 적패지(赤牌旨)를 살피던 염라대왕의 난감해 했다. 아직 올 때가 안된 사람을 잘못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대왕이 사과했다.
“내 불찰로 너무 빨리 데려왔으니 다시 보네 드리리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라오. 대신 소원이 있다면 들어줄 터이니 말해보도록 하시오.”
“딱히 소원은 없습니다만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극락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 보고 갔으면 합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곤란했지만 이미 들어주기로 하고 말한 터라 허락했다. 그리고 어디부터 가보고 싶은지를 물었다.
“지옥부터 가보고 싶습니다.”
대왕은 저승사자를 대동하여 지옥구경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자를 벗 삼아 지옥에 도착하고 보니 지옥의 모습이 인간세상에서 듣던 것과 사뭇 달랐다. 유황불이나 끓는 기름 가마도 없고, 칼로 된 나무도 없었다. 또 무시무시한 형구(形具)나 나찰(羅刹)들도 보이질 않는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쾌적하기가 더할 나위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옥이 이런 곳일진대 그간 겁낸 것이 무색한 일이로구나. 오히려 이런 곳에서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곧 식사시간이 되었다. 순식간에 식탁이 꾸며지더니 인간세상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산해진미가 가득히 차려졌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옥을 실감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모두들 피골이 상접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사람들의 양팔을 모두 압박붕대로 고정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손에는 식사 도구인 젓가락이 들려있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허기가 졌던지 식사개시를 알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먹으려 달려들어 음식을 집었다. 그러나 팔은 깁스가 되어있고 젓가락은 길지 않았기에 집은 음식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주어진 식사시간이 짧지 않았는데도 애만 썼지 정작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식사시간은 다 지나가고 음식물은 그대로 치워지고 말았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저승사자가 말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극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자를 따라 극락으로 갔다. 지옥과 크게 다를 것을 기대하였지만 전혀 다르지 않았다. 도착한 시간이 마침 식사시간이었는데 쾌적한 환경은 물론 차려진 음식도 지옥과 같았고 사람들 양팔에 깁스가 되어있는 것까지도 같았다. 식사시간도 지옥과 비교해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젓가락 길이가 긴 것도 아니었다. 너무 똑같아 지옥과 전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편안하고 윤택해 보였다.
드디어 식사개시를 알리자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주인공의 관심은 이들이 어떻게 음식을 먹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전혀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음식을 집어 본인의 입에 넣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 정성스럽게 넣어주는 것이었다. 앞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또 옆 사람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 그 사람이 원하는 음식이 있는 듯하면 그 것을 집어 먹여주는 아량을 서로 베풀고 있었다. 젓가락의 길이가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기에는 짧았지만 상대에게 제공하는 데는 전혀 불편치 않았다.

유토피아 (no where와 now here)
언젠가 유토피아(Utopia)에 대해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강조해 보고 싶다. 이상향(理想鄕)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원래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 ‘없는(ou-)’과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것이란다. 영역하면 ‘no where’가 된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치 있는 사람이 ‘where’에서 ‘w’를 앞의 ‘no’ 뒤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랬더니 ‘now here’가 된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자리하고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w’자를 옮겨놓는 그런 지혜다. 불자들이 즐겨 염송하는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頓捨貪嗔癡(돈사탐진치) 독중의독 삼독심은 미련없이 버리시고
常歸佛法僧(상귀불법승) 한결같이 삼보님께 지성귀의 하시면서
念念菩提心(염념보리심) 일구월심 생각마다 깨달음을 향하시면
處處安樂國(처처안락국) 계신곳이 어디시든 안락국토 아니리까?!

부처님과 예수님의 화투놀이
6 · 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아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돌던 이야기가 있었다. 엉뚱하게도 부처님하고 예수님하고 화투놀이를 하셨다는 것. 그것도 내기를 걸고 하셨다는데, 그 내기가 꿀밤 맞기였다나… 그런데 부처님께서 번번이 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꿀밤세례를 받으신 나머지 머리 여기저기에 혹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부처님의 머리모습이 뽈록뽈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 두상이 소라모습을 한 나발상(螺髮相)에서 힌트를 얻은 모양이다.
계속해서 지기만 하던 부처님께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승부사의 기질을 지니고 계셨던지 막판에 지금까지 당하신 만큼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거셨는데 다행히 이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회심의 미소를 띠시면서 예수님의 머리를 바라보셨다. 눈길이 마주치자 예수님은 눈앞이 캄캄하실 수밖에 없었다. 봐달라고 사정을 하실 수밖에….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당하신 것이 있었던 지라 예수님을 달래시며 이마를 요구하셨다. 그래서 왼손은 펴시고 오른손은 꿀밤 때리기 자세를 취하셨다. 부처님께서 지으신 수인(手印)이 그렇게 비쳐졌던 모양이다. 예수님은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양팔을 벌리고 항복을 표시하며 애원했다는 것이다.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했다는 거대한 그리스도의 석상이 코르코바도(Corcovad)산 언덕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양팔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보니 대부분의 예수상은 양팔을 벌리고 있다.
두 분 외모의 특징과 표정을 들어가며 만들어낸 우스갯소리지만 그럴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6 · 25 후, 물밀 듯 들어온 서구 문화와 이 땅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문화가 충돌하는 모습의 편린을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이런 문화충돌로 그동안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많은 몸살을 앓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이 가볍지 않다. 스님에게 예수 믿을 것을 강권하는 모습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생각컨대 부처님과 예수님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신다면, 아니 공자님이나 노자님 혹은 마호메트님 등이 함께 자리하신다면 주제는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정말이지 우리 민족은 슬기롭다. 다른 나라의 경우, 종교로 인해 겪는 갈등과 폐해가 심각한데 비하면 말이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가 어디 남이가?!

지혜로운 사람은 쌀로 밥을 짓는다
예전에 수행자가 있었다. 깊은 산 속 바위굴이 그의 집이었다. 기름진 음식도, 호화로운 저택도 그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명상의 기쁨 속에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벗이 귀한 책을 보내왔다. 너무나 고마운 선물에 기뻐하며 읽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책을 보니 쥐가 표지 일부를 갉아먹었다. 안되겠다 싶어 고양이를 한 마리 구했다. 고양이가 배가 고파했다. 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 암소를 얻었다. 혼자 돌보기 힘들어 여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집을 지었다. 몇 년이 지나자 귀여운 아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명상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수행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를…. 다름 아닌 집착이 문제였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방금 전의 수행자처럼 행복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지으려는 것은 마술사들이 하는 일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쌀로 밥을 짓는다.
한때 방향을 잘 못 잡은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에게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께서 일침을 가하셨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멈추었다고 하자.
수레를 두드려야 되겠느냐? 소를 다그쳐야 하겠느냐?
(譬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마조 스님은 이 말씀 한 마디에 바로 깨치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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