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善心’과 ‘至誠心’, ‘信心’이 꼭 필요

이판과 사판의 관계는 앞서 말한 ‘낭’과 ‘패’를 닮아 있다. 서로 존중하며 자신의 본분에 충실을 기하면 도업성취에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낭’과 ‘패’가 그랬듯 서로가 갑(甲)임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원만한 관계는 무너지고 도업성취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절 집안에서 화합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런데 화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이 우선되어야 한다. 소통은 서로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고, 화합은 누구의 자존심이던 크기와 무게가 같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에서와 같은 사단이 벌어진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礙大悲心陀羅尼經)>! 대부분의 밀교 경전이 그렇듯 제목이 다소 길다. 흔히 <천수경>이라 불리는 이 경은 7세기경 서인도 스님인 가범달마(伽梵達摩) 삼장께서 당나라에 오셔서 번역하신 것이다. 서두에 이 경명을 거론하는 것은, 경 가운데 도를 이루기 위해 수행자가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자세를 제시하고 있어서이다. 세 가지 마음이란, ‘선심(善心)’과 ‘지성심(至誠心)’ 그리고 ‘신심(信心)’이다.

낭패(狼狽)를 통해 본 善心
<금강경> 32분절(分節)의 주인공은 양무제의 아드님이신 소명태자(昭明太子)이다. 이 소명태자가 엮은 시문집 <문선(文選)>에 ‘낭패’라는 말이 보인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낭’과 ‘패’는 본래 상상 속의 동물로서 각각 다른 개체다. 생김새는 두 마리 모두 이리와 비슷한데 ‘낭’은 뒷다리가 퇴화돼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아주 짧다. 한편 ‘패’는 ‘낭’과 달리 앞다리가 그런 지경이다. 성정도 다르다. ‘낭’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고 적극적이다. 이에 비해 ‘패’는 매우 영리한데 소극적이다.
어찌됐건 두 마리는 각자 혼자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낭’과 ‘패’가 힘을 합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끼라도 잡을라치면, ‘낭’은 ‘패’의 앞다리가 됨은 물론 용맹스럽게 공격한다. 이때 ‘패’는 계획을 세우고 동시에 ‘낭’의 뒷다리 역할을 해서 포획에 만전을 기한다.
‘낭’과 ‘패’는 이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쩌다 ‘낭’이 자신의 용맹스러움을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패’가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하다 보면 서로 결별하는 사태에까지 이른다. 정작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두 마리 모두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살정신 투철한 사판승 ‘주지’
절집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승려는 정치나 가업 등 세간사, 심지어 부모님 섬기는 것조차 뒤로한 채 출가한다. 이런 승려에게 본분은 오직 도를 닦는 것이다. 하나 더 꼽는다면 수도자들의 수행여건 조성과 사찰의 유지보존을 위해 자신의 수행을 잠시 뒤로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를 ‘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후자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한다.
한 사찰을 대표하는 ‘주지(住持)’라는 직책에 대해 살펴보면, ‘구주호지불법(久住護持佛法)’ 즉, 일정한 사찰에 오래 머물며 불법을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의미다. 승려는 본래 한 곳에 오래 머묾을 금기시 한다.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직책을 맡는 것은, <능엄경>에서 ‘자신이 도를 얻지 못할지라도 타인을 먼저 제도하라(自未得度先度他)’고 하심에 입각한 것이다. 중생들의 성불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도업까지도 뒤로 미루리라는 ‘보살정신이 투철한 실천자’가 주지이다. 사판승의 마음자세는 모두 이와 같다.

이판사판과 낭패는 닮은꼴
그런데 묘하게도 이판과 사판의 관계는 앞서 말한 ‘낭’과 ‘패’를 닮아 있다. 서로 존중하며 자신의 본분에 충실을 기하면 도업성취에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낭’과 ‘패’가 그랬듯 서로가 갑(甲)임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원만한 관계는 무너지고 도업성취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절 집안에서 화합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런데 화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이 우선되어야 한다. 소통은 서로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고, 화합은 누구의 자존심이던 크기와 무게가 같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에서와 같은 사단이 벌어진다. 떫은맛 탄닌(tannin)을 단맛이 되게 하기까지는 많은 공력이 들어가지만, 그 맛을 유지시키는 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유위법(有爲法)이 지니는 한계다.
석존께서는 <금강경>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8에서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숫자만큼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놓고 보시했다고 하자. 또, 다른 어떤 사람이 모든 존재에는 ‘변함 없는 자아’가 없음을 깨닫고 확실한 지혜를 이룬다면, 이 보살의 공덕은 앞서 말한 보살의 공덕보다 훨씬 수승하니라(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고 하셨고, 육조 혜능(慧能) 스님께서는 이를 해설하시면서
모든 존재를 통달해서 상대와 나를 구분하는 생각이 없는 것을 인(忍, 진리)이라 한다. 이 사람이 얻는 바 복덕은 앞에서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니라(通達一切法 無能所心者 是名爲忍 此人所得福德 勝前七寶福也).
고 하셨다. 이래서 영명지각수(永明智覺壽) 선사께서는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에서 ‘먼저 출현하신 성인이나 나중에 출현하신 성인이 그 법도에 있어서는 한결 같으시다(前聖後聖 其揆一也)’고 하신 모양이다.
완전한 소통과 바람직한 화합은 금세기에 있어서도 변함없는 화두이지만 나와 남을 구분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낭’이 ‘패’이고 ‘패’가 곧 ‘낭’이며, 이판(理判)이 사판(事判)이고 사판이 곧 이판인 경지가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수레에는 두 바퀴가 있음으로써 또, 새에게는 두 날개가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됨을 깨달아야 한다.

修者에게 ‘지성심’은 0순위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와 머리에 불이 붙었을 때, 어느 쪽이 더 급할까? 예전에 젊은 수자가 도를 구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큰스님을 찾았다.
“도를 구하는 방법을 여쭙고자 왔습니다.”
“정말 도를 구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너라.”
스님은 젊은 수자를 수각(水閣)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도를 구하고 싶다했더냐! 그렇다면 이 안을 들여다 보거라.”
젊은 수자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수조(水槽)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물 말고 달리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잘 살펴 보거라.”
수자가 얼굴을 물 가까이 바짝 갖다 대었다. 그 순간 스님은 수자의 목덜미를 잡아 물속으로 힘껏 처박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수자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수자가 저승 문턱을 막 넘으려는 순간 스님은 눌렀던 손을 비로소 놓았다. 수자는 기진맥진했다. 얼마가 지났는지 겨우 안정을 찾은 수자의 귓가에 스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코를 물에 박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생각이 다 뭡니까.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그랬구나. 이제 그걸 알았으니 더 이상 네게 가르쳐줄 것이 없느니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수자에게 스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살아야겠다는 일념, 도는 바로 그런 생각으로 구해야 얻을 수 있느니라.”
도를 구하는 일이 0순위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세간사도 목숨을 걸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일이 그리 흔치않다. 하물며 도임에랴!

신심회복으로 탄생한 ‘도로아미타불’
예전에 입춘이 지난 어느 때, 스님 한 분이 길을 나섰다. 한참을 가다 큰 개울을 만났는데 웬만한 강만큼 넓었다. 게다가 다리가 놓인 곳은 너무 멀었다. 다행히 아직은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얼음이 견뎌만 준다면 굳이 멀리 있는 다리까지 갈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요행을 바라며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갑자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스님은 본능적으로 엎드렸다. 두 다리로 집중되던 몸무게가 네 곳으로 분산되어서인지 더 이상 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지 싶어서 조금씩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운데쯤 갔는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신경을 쓴 탓인지 아까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순간 스님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무아미타불’ 하고 신앙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나무~’하고 한쪽 손을 내밀고, ‘아미~’하고 한쪽 다리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다시 ‘타불~’하고는 또 다른 손을 내밀었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개울을 건너갔다.
스님은 안도하면서 엉뚱한 말을 했다. ‘아미타불은 무슨 아미타불, 내가 조심했으니까 무사히 건너왔지…’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은 이 스님을 두고 한 말이지 싶다. 어쨌거나 다시 길을 재촉하려는데 왠지 등 쪽이 허전했다. 아뿔싸! 저쪽 언덕에 있을 때, 건널까 말까 망설이느라 잠시 걸망을 벗어놓고는 그냥 맨몸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낭패였다.
어쩔 수 없이 되 건너기 시작했다. 건너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던지라 처음부터 네발로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전에 했던 혼잣말이 생각났다. 양심상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문 채 가운데쯤 이르렀을 때였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너무도 놀란 스님은 얼음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아이고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그 뒤로 이와 유사한 경우에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한다. 요즈음에는 도로무공(徒勞無功) 즉, 애쓴 일이 허사가 된 경우에 주로 이 말을 쓰는데 용례가 틀렸다. 신심이 한결같아야 함을 요구하는 말이다.
‘도가 사람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 하는 것이라(道不遠人 人自遠矣)’ 했다. 이런 말씀에 바탕을 두고 <천수경>에서 말씀하신 ‘선심’과 ‘지성심’ 그리고 ‘신심’의 예를 위에서 살핀 이야기를 통해 공감해보자. 이들 세 박자만 맞으면 이루지 못할 도가 어디 있으랴! 
<글> 만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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