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스님

새해에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부처님 고행상(苦行相)을 가까이 모셔두고 싶다. 정각(正覺)을 얻기 위해 설산에서 고행하시며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부처님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이것이 복전(福田)을 일구는 일이지 않겠는가

나는 스님이 되어 처음으로 한 신도의 가정집에 안택 불공을 갔다. 모든 의식과 축원을 모시고 불공이 끝나니, 그 집 남자 주인은 어린 스님인 나에게 절을 하면서 “스님! 우리 집에 만복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물러갔다. 그 말씀을 듣고 ‘아하! 스님이란 소임은 많은 사람들에게 만복을 지어주는 자리로구나! 중노릇 잘해야겠다.”라고 다짐했던 일이 엊그제와 같다.

우리는 만복이건 천복이건 복을 좋아한다. 모두가 복 받아 풍족한 삶을 누리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복이 많다”거나, “저 사람은 복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이때 복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재산이 많으면 복이 있는 사람이고, 재산이 없으면 복이 없는 사람일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은 복이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이러한 범주 내에서 복을 생각하고 정의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재물, 명예, 권력을 갖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한다.

복에는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이 있다. 여기에서 루(漏 샐 루)는 샌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고 있는 지혜와 복을 새어나가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말이다.
유루복은 힘센 장수가 허공에 화살을 쏘아 아무리 높이 올려도 언젠가는 다시 땅으로 떨어지듯 한계가 있는 복으로, 어느 때인가는 없어지고 마는 복이다. 마치 단단하게 보이는 유리병도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깨어질 수 밖에 없듯이, 언젠가는 끝나게 될 수밖에 없어 한계가 있는, 중생이 누리는 복이다. 이러한 복은 아무리 받아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것이 탐욕이고 욕망이 아닌가. 이것들은 바다 속의 물고기들이 플라스틱 미끼에 홀려 낚시 바늘에 걸려드는 것처럼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반면 무루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공기와 같아서 우리가 수용하되 수용하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복이다. 진정한 무루복은 내 안의 참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깨달아 아집(我執)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복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아(無我)를 터득한 보살이 누리는 복이다.

우리는 무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내가 없는 것’, ‘나를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하여, 세상을 도피하거나 소극적이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단멸상(斷滅相)을 취한 것이므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무아를 체득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나를 잊는 것이다. 즉 ‘나’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도사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남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발 벗고 나서며,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전심전력을 다하면서도 털끝만큼도 명성이나 권력 그리고 보답 등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 비로소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된다. ‘나’라는 생각,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고 생멸의 씨앗임을 알아 이를 벗어나는 것만이 최상의 복이요 지혜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아를 체득할 수 있는 방법을 바르게 알아 꾸준하게 인내심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쌓아 성불(成佛)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 시종일관 복을 말할 때 ‘수지독송(受持讀誦)’과 ‘위타인설(爲他人說)’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수지 독송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수받는 일이요, 그것을 남들에게 전해 준다는 것은 곧 최상의 복인 무루의 복을 이루는 길이다. 누구든지 <금강경>을 제대로 알고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마치 얼음이 녹듯 중생심이 녹아 큰 지혜를 얻어 부처님과 같은 복을 얻게 된다. 이는 세간의 복만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에게 무루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쳐 주어, 그 사람의 인생관을 바꾸게 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 같이 바른 법을 남에게 일러 주어서 법을 들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는 공덕이야말로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짓는 것보다는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남에게 설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신 것이다.

인간의 경제적 삶은 인간존재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가치는 그것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집에 금은보화로 채워 놓는 것이 중요한가?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이라도 참으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가?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은, 부처님의 이 같은 말씀에 대해 복을 짓는 데 차별을 두어 유루의 복을 무시하고 무루의 복만 쌓으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은 유루의 복과 무루의 복을 반대 개념으로 보고 무루의 복만을 강조하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루의 행에만 머물지 말고 무루의 행도 쌓아 복의 완성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다.
지도자가 복 짓는 법에 대하여 중국의 법연(法演)선사는 4가지를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첫째, 세력을 다 부려서는 안 된다.
둘째, 복을 다 누려서는 안 된다.
셋째, 규율을 다 시행해서는 안 된다.
넷째, 좋은 말을 다 해서는 안 된다.

직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부리는 지도자는 가장 낮은 수준이 지도자요, 남을 위해 복을 짓지 않고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복으로 착각하고 그 자리를 남용하는 지도자는 그 다음 수준의 지도자요, 인정과 도리를 떠나 법으로써 시비를 가리려는 지도자는 더 낮은 수준의 지도자이며, 허영과 공명심으로 책임 없는 말을 하는 지도자는 수준에도 오르지 못하는 최악의 지도자의 모습일 것이다.
어찌 이러한 당부가 먼 옛날의 가르침이겠는가? 현재의 우리들이 마땅히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인 것이다.

지도자를 분류할 때, 첫째의 덕목으로 용장(勇將)을 꼽는다. 용장은 용맹하여 추진력이 있다. 그러나 용장보다 더 좋은 지도자는 지장(智將)이고, 지장보다 더 좋은 지도자는 덕장(德將)이다. 덕장은 사람들을 덕으로써 편안하게 감싸주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하는 지도자는 복을 짓는 지도자, 즉 복장(福將)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에 올바른 지도자는 참되게 복을 짓는 방법을 알아 복을 짓고, 복을 짓도록 배려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남을 위해 지은 복은 나를 향해 되돌아오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이다.

새해에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부처님 고행상(苦行相)을 가까이 모셔두고 싶다. 정각(正覺)을 얻기 위해 설산에서 고행하시며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부처님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이것이 복전(福田)을 일구는 일이지 않겠는가.
복 없다 타령마소/ 복 밭에 씨 뿌리세/ 밝은 마음 웃는 얼굴/ 만족하는 그 생활이/ 흐르는 천강수에/ 둥근달이 나타나듯/ 곳곳마다 꽃을 피워/ 만 천하를 장엄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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