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성 렬(조선대 철학과 명예교수)
선시에는 납득키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꼭 등장하기 마련이다. 석인(石人)·석호(石虎)·목계(木鷄)·무공적(無孔笛)·니우(泥牛)·귀모토각(龜毛兎角) 등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鏡虛, 1846~1912) 선사도 그랬다.

“돌사람[石人]이 피리 불고 목마(木馬)가 졸고 있다”거나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문득 깨달았네(頓覺三千是我家)” 등 모두가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것만이 아니다. 막행막식을 무애행이라 미화하기도 한다.

작년 이맘 때 쯤, 승려들의 행리가 세간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은 다반사였고, 여색(女色)도 서슴지 않는 일탈의 사건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선승의 무애행이라 할 수 있으나 부정적으로 보면 ‘승가의 뿌리를 뒤흔드는 계율 파괴 행위’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계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승속을 막론하고 지켜야할 오계(五戒)인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가 있고 그 다음 팔계, 십계, 삼귀의계(三歸依戒),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가 있다. 이 복잡하고 엄격한 계율에 비추어 행의 잘 잘못을 가리지는 않더라도 승속이 모두 수지해야할 5계에 비추어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 시대에는 승가를 이루고 나름대로의 생활규정을 정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다. 계율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atimoka)라고 하는데, 계(戒, ila)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의미가 있고, 율(律, Vinaya)은 법률(法律)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계율이란 본래의 의미로서 본다면 번뇌의 발동을 방비하여 단멸 하려는 생활규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가는 특히 부처의 입멸 후에 부처님의 교법을 호지(護持)하고 이것을 후대에까지 전하려면 세인의 신망과 존경을 얻어야 하고, 또한 승가의 구성원들이 세인의 비난을 초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교단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규정이 나왔던 것이다.

작금에 일어난 승려들의 모든 일탈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비구, 비구니의 엄격한 계율 안에서의 일탈이 아니라 일반 재가불자들도 수지하여 지키는 5계조차도 제대로 수지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승가를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불가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모든 승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승풍을 진작시킨 스님들도 얼마든지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절필(絶筆)이 되고만 ‘판전(板殿)’이란 글씨가 그런 경우이다. 그 글씨의 낙관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하여 당시 추사는 71세로 병중에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글씨를 쓰게 되었을까? 바로 남호영기(南湖永奇, 1820~1872) 스님의 계행(戒行)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1856년 남호 율사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를 목판에 판각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3,175매나 되는 판각 불사가 일년 만에 완성되자 그는 철원 보개산으로 몸을 숨겼다. 판각불사를 시주한 한 과부와의 약속 때문이다.

남호스님을 사모하던 한 과부가 스님과의 동침을 조건으로 그 불사의 시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스님은 오로지 불사를 이루려는 욕심에서 과부의 요구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추사는 병중임에도 남호 율사의 계행(戒行)에 감복하여 판전의 편액 글씨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수행자를 기르고자 하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왜 그런가 하면 천인의 스승[天人師]이 되고자 출가한 분들이 스님이다.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려면 계행이 청정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나 사표(師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번뇌를 버리고 천상으로 오르는 데는 계행(戒行)이 훌륭한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파계하고서 남의 복전(福田)이 된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로 오르려는 것과 같다. 스스로의 죄업을 벗지 못한 이는 다른 이의 죄업을 풀어 줄 수 없으니, 계행이 없는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棄世間喧 乘空天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如折翼鳥 負龜翔空 自罪未脫 他罪不贖 然 豈無戒行 受他供給)”.
이 땅의 모든 수행자들은 이 말씀을 천둥소리처럼 들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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