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재 철(제주대학교 중문학과 교수)
선문답이나 게송 등에 자주 등장하는 ‘귀모토각(龜毛兎角)’은 본체와 현상을 비유적으로 상징한 말이다. 거북과 토끼는 본체를, 털과 뿔은 현상을 각각 상징한다. 원래 거북에는 털이 없고, 토끼에는 뿔이 없다. 따라서 토끼의 뿔도 거북의 털도 말로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있지도 않은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을 구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번뇌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게 있지도 않은 ‘거북의 털이 석자가 길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번뇌 망상의 아집이 헛되이 자랐음을 비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진짜 나는 없다. 어제의 내가 나라면, 오늘이나 내일의 나는 내가 아니고, 반대로 오늘이나 내일의 내가 나라면,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도 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단지 나라고 생각되는 형상이 잠시 보여지고 있을 뿐, 진짜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몸이 이러한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을 소유하겠다고 수없이 많은 정력을 들여가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들의 계획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 어려서는 혹 남에게 뒤질세라 각종 학원을 전전하여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성장해서는 잘나가는 회사에 취직하여 결혼하며, 부모님들이 그랬듯이 자식을 낳아, 또 내가 걸어온 길을 자녀에게 물려준다.

이와 같이, 이 사바세계의 수많은 중생들은, 마치 더러운 그릇 가운데에서 웅웅 거리며 울어대는 쉬파리마냥 있지도 않은 이익을 좇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이곳에 앉으면 얻을 것이 많고 저곳에 앉으면 얻을 것이 적다고 하여, 앞 다투어 좋은 자리에 앉아보겠다고 분주하다. 그것도 뜻이라면 뜻이라고, 사람들은 이런 저런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누구나 뜻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좌절한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뜻을 못 이루어 좌절하며 마음이 피폐해질 때,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부모 만나, 남들보다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할 것만 같은 그들 중에도 결국 자살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떤 이는 성공한 정치인이고, 어떤 이는 돈 많은 재벌집의 자식이다.

취직전선에 내몰려 오늘도 좋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야, 어찌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까마는,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왔을 것이고, 그 동안 쌓아둔 재산도 많을 것이니, 하는 일 없이 살아도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으련만, 무엇이 부족하여 자살까지 하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소유한 사람이 자살하다니, 욕심의 끝은 어디이고, 목숨을 버려야 할 만큼 중요한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또 왜 끝없이 욕심을 부려야 하는가? 그 욕심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 것인가?

나도 어려서는 멋모르고 그 대열에 서서, 남과 다투어 그들보다 앞서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로 알고 살아왔으며, 결혼하여서는 처자식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인 것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항상 배가 고프다.

이 사바세계에서 잘 살기 위한 가장 안정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고, 열심히 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님들은 그저 앉아 있으면서 공부한다고 한다. 공부란 반드시 책을 펴서 읽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이 되는 지식을 쌓아야 하는 것이라고 아는 범인으로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으면서 공부를 한다니 말이다.

소위 배운 사람들은 지식을 추구하며, 그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고 한다. 지식은 분별이다. 사실 지식이 없다고 못 살지는 않는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당신은 글을 몰라 평생을 불편하게 살았지만,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자식을 가르친 부모는, 다 늙은 연세에 가까스로 글을 배워도 행복하게 사는 반면, 배울 것 다 배워 편하게 살아왔던 자는 자살을 한다.

그가 행복한 것은 그것을 욕심내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욕심내지 않는 것은 자기와는 다른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와 가까이 와 있고,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욕심을 내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한다. 나라는 몸도 없을 터인데, 마음이 만들어낸 욕심이라는 것이 어찌 있을까마는 말과 같이 쉽지는 않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야 존재하는 나는 본시 없는 것이고, 경계 또한 없는 것인지를 알아, 나와 남을 구분하거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욕심도 없을 것이니, 이러한 자를 지혜를 얻은 자라고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취하려다가 실패하면 온 마음으로 슬퍼하게 되고, 마음이 슬프게 되면 몸도 따라 아프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으면 실패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슬퍼할 일도 없지만, 시작을 했으니 마음이 슬프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애초에는 없는 것이니, 소유하려고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설령 운 좋게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원래부터 없는 것임을 알아 좋아할 일도 아니다.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을 얻어, 그것에 집착하여 사는 것은, 단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방편일 뿐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앞선 것도 뒤진 것도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그저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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