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륜청정(三輪淸淨) 
법 안 (총무원 기획부장)

지난 연말에 남아시아의 해저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남아시아 국가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며칠 전 스리랑카 대사관으로부터 한통의 팩스를 받았다. 구호를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스리랑카 25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는 사실과 외부의 지원 없이는 복구하기가 힘든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신도회와 협의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 스리랑카에서 온 우파리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는 스리랑카의 엘리트이다. 그는 몇 명의 산업연수생과 일요일마다 절을 찾아 법회를 보고, 스리랑카의 산업연수생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스리랑카에 있을 때에는 시의원을 지냈고, 엘리트 직종에 종사하였다는 사실도 뒤에 알았다. 
우리가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부처님 당시에는 오늘날도 건재한 현실 문제 인식방법이 존재했었다. 그것이 바로 삼종외도(三種外道)이다. 삼종외도란 오늘날 언어로 말하면 첫째, 천지창조론이요, 둘째, 숙명론이요, 셋째, 유물론이다. ‘쓰나미’란 지진해일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천지창조론에서는 오직 천지 창조한 신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천지 창조한 신의 뜻을 펴기 위하여 재앙을 몰아왔거나, 창조신의 뜻에 맞지 않으므로 징벌하거나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둘째는 숙명론이다. 그럴만한 전생의 업에 의하여 한꺼번에 몇 십 만 명의 사람이 죽고 수백 만 명이 재난을 당했다는 이론이다. 얼마쯤은 그럴 듯한 부분이 없지 않다. 즉 현상을 얼마정도 이해할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셋째는 우연론이라고도 하고 유물론이라고도 표현한다. ‘쓰나미’는 우연히 그런 것뿐이지 천지창조신의 뜻도, 전생의 업에 의한 숙명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은 그 세 가지의 선상을 달리 한다.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무엇인가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의하여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구의 몇 개의 지판들이 움직이면서 지진이 일어났고 그 지진에 의하여 해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장 과학적이고 진리적인 관점이다. 진리는 어느 곳 어느 시점에서도 온전히 통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부분적인 진리는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고 단정하신다. 오늘날에도 지구상의 많은 인류가 진리라고 믿는 부분들의 허점이다. 위에 세 가지의 외도들은 부분적 해석은 그럴 듯 하지만, 윤리도덕의 문제에 들어가면 전혀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 창조를 믿든, 숙명론을 믿든, 유물론을 믿든 간에 일단 윤리도덕의 문제에 들어가면 그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짓고 인간이 그 죄를 받는 주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천재지변도 마찬가지요,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그렇다. 인간이 그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재난의 현장에는 또 하나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바로 강대국들의 지원금 금액 경쟁이다. 남아시아국가의 재난이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름과 능력을 과시하는 장으로 변해버렸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베풀음에 있어서의 태도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듯이 ‘보시’ 즉 베풀고 나눔에 있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 베푸는 자도, 베품을 받는 자도, 베품의 물건도 모두 청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재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 나의 위력과 재력,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지원금액을 높이는 경쟁을 벌이고 있음에,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은 한 마디 거든다. “이번만은 제발 약속한 금액을 꼭 지원해주기 바란다”고, 언론에만 약속해놓고 어느새 살며시 약속을 식언해 버리는 강대국들의 속성에 대한 일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원의 손길이 속속들이 전달되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 적극성을 띄고 있다. 피해국인 동남아 불교국가인 태국과 스리랑카,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를 겨냥하여 ‘기독교 선교의 호기’라고 생각하고 의도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아픔을 내 종교를 전하는 호기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구호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어느 군부대 교육기관장을 만났다. 불자인 그 기관장은 “항상 물질적인 지원은 기독교에 비하여 불교계가 열악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기관장은 앞으로 종교계에서 들어오는 모든 지원물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훈련생이 고루 나누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그러니 지원물이 많이 들어오는 기독교 군목사가 의의를 제기하자 그 기관장은 “만약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기독교 믿는 훈련생들만 먹이라고 하실까” 물었단다. 
석가세존께서 말씀하신 삼륜청정, 베푼다는 상을 갖지 않고 베풀어야 하고, 그 베푼 은혜에 묶여서 올바른 판단을 못하게 되는 어리석은 마음, 그 베푸는 물건이 청정한 마음들이 모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는 과연 이 부분에 대하여 그냥 지나갔을까? 아니다. 예수도 한마디 했다고 성경에 적혀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이다. 
봉사에는 봉사의 정신과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세태가 아무리 오탁악세이고 말법시대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가 기본으로 돌아가서 구호도, 원조도, 지원도 해야 할 때이다. 성인이 가신지가 오래되어 법은 약하고 마는 강하더라도 기본에 충실하면 그것이 바로 정법시대 아니런가? 정녕 말법시대에 사는 정법인이 아니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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