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천동설’에 맞선 지율스님
서진석 (365일 자연체험여행 작가)

지난 2월 3일. 지율스님이 단식을 시작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자, 정부가 지율스님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며 스님이 단식을 푼 날이기도 하다. 정부가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공사와 관련, 향후 3개월간 환경영향공동조사를 실시하기로 수용한 것이다.
지율스님이 천성산을 지켜내기 위한 여정은 고행의 여정이었다. 지난 2002년 6월 경부고속철도 2단계 공사로 대구-부산 간 공사를 착공하자 지율스님의 힘든 고행은 시작되었다. 2년여 사이에 짧게는 38일, 길게는 100일이라는 초인적인 단식을 네 차례나 벌이기도 했다. 
언론은 지율스님의 초인적인 단식과 천성산 공사를 중단했을 경우의 경제적 손실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정작 지율스님의 주장, 더 나아가서는 지율스님의 자연에 대한 생각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환경영향공동조사가 단식이라는 물리적 힘에 의해 정부가 밀린 것이라면 그것은 지율스님이 바라던 바는 아니다. 자연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지율스님의 세상을 향한 수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땅에 / 뭇 생명의 신음소리 그치지 않으니 / 이 무상한 육신을 버려 / 천성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 기꺼이 저자거리에 나가 / 몸과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 버리겠습니다”
지난 1월 단식 91일째 잠적하며 지율스님이 남긴 시 ‘천성의 품을 떠나며’이다. 지난해 12월 단식농성 장소를 부산 시청에서 청와대 앞으로 옮기면서는 “내 몸보다 천성산이 더 크고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율스님은 자연의 생물도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생각했고, 이것은 천성산을 살리려는 그의 행동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천성산 도롱뇽 소송’이다.
도롱뇽 소송은 지난 2003년 10월에 제기되었다. 경남 양산시 내원사 뒷편에 있는 천성산에 13.5km에 달하는 터널공사를 하려 하자, 대변인 ‘도롱뇽의 친구들’이 부산지방법원에 도롱뇽을 원고로 공사를 착공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으로 정식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도롱뇽의 친구들’의 한 사람인 지율스님은 자신이 원고가 되지 않고 천성산에 살고 있는 생물을 원고로 내세웠다. 동물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흔히들 그냥 에피소드 정도로 지나칠지 모르겠다. 더 나아간다 해도 천성산 생태계 보호를 널리 알리려고 하는 하나의 활동 차원으로 이해할 듯 싶다.
그런데 생각해볼수록 도롱뇽 소송은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만약 소송 당사자가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지율스님 등 3명으로 되어 있는 대변인 자신이나 환경을 사랑하고 그 보존된 환경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사람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제기했다면 좀 더 수월하게 소송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들면 천성산 습지 생태계나 보호생물 등으로 인해 과학적 탐구나 휴양이나 교육적 혜택을 누려왔는데, 터널공사로 인해 이러한 이익이 침해당할 처지에 놓였다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롱뇽의 친구들’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환경소송을 보아왔다. 그 환경소송들로 인해 주민의 피해가 올바르게 인정받기도 했고, 생태계가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환경이라는 시대정신의 승리로 보기도 했다. 
그 환경소송들이 환경파괴를 막고 생태계를 보호한 공로는 크지만, 하나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내용으로 전개된 소송이지, 정착 ‘자연생태계 자체의 생존 또는 이익’을 위한 소송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자연생태계의 생존을 명백히 해쳤다 할지라도 인간의 이익을 해쳤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패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동안의 환경소송이었던 것이다.
지율스님은 그래서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인간의 이익’이 아니라 ‘자연의 이익’을 내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피해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쉬운 길을 버리고, 자연이 피해받는다는 어려운 길로 접어든 것이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나무를 보호해야 이유는 홍수 방지, 산소 공급, 휴양지 제공 등 때문이라고 배워왔다. 주로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에 보호해야 하는 논리이지 나무 역시 지구의 주인 중 하나이기 때문에 헤치면 안된다는 얘기는 없다. 
우주가 인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이라면 아직도 천동설은 존재하고 있다. 모든 생물의 판단 기준을 인간에게 유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삼는 ‘新천동설’이 그것이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도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거미줄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거미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인간도 자연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드와미쉬-수콰미쉬족의 시애틀 추장의 말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해주고 있다.
하심(下心)이란 말이 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이는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지율스님이 진정 주장했던 것은 자연 위에 군림하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인간들이 자연을 향해 몸을 낮추자는 것일 게다. 그것이 당장은 좀 덜 얻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길일 것이다.
지율스님을 요즘 언론에서는 ‘천성산 지킴이’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지율스님에게 맞는 호칭은 ‘자연의 대변인’일 것이다. 신천동설이 아직 버젓이 있는 한 지율스님을 잇는 자연의 대변인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