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정신으로 보시 많이 해 공덕 쌓으세요

역경에 부딪치거나 경계를 만났을 때 마음을 잘 써서 극복해 ‘걸림돌’이 도리어 ‘디딤돌’이 되도록 긍정적인 마인드와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집착은 모든 괴로움의 씨앗, 집착 없이 주는 것이 공덕을 쌓는 길이며 받는 것은 결국 되돌려 줄 빚을 지는 것과 같아요 
 

지암(智巖)스님은 1957년 3월 선암사에서 종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57년 5월 선암사에서 이지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65년 5월 광주 관음사에서 대승보살계 수지. 1960년까지 선암사에서 5안거 성만. 72년 광주 증심사에서 종산스님에게 입실건당. 75년 광주 세심정사 창건. 80년과 94년 법당 중창 낙성. 광주 세심정사 주지와 광주전남교구 초대 2대 종무원장, 총무원 부원장, 순천 선암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원로회의 의원이며 세심정사 회주를 맡고 있다. 대종사 법계 품수.

내가 평생 혼신을 다해 불사하고 가꾸어온 포교도량 광주 세심정사를 지난 10월 문도회에 기증한 것이 종단의 화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태고종의 특성상 나의 이러한 기증이 남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나이 올해 76세니 출가생활이 60년이 되었습니다.  60년동안 너무도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절 없는 고통이었지요. 부처님을 등에 업고 사글세 집을 전전했던 아픔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던 중 신도님들의 돈독한 신심에 의해 1980년 광주 운림동에 터전을 마련하고 세심정사를 창건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93년 법당에 화재가 났는데 활활 타는 불속에 묵묵히 앉아계시는 부처님을 보면서 나도 같이 불속에 뛰어들어 부처님과 함께 산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절을 지어 제자들에게 사자상승해야겠다는 일념이 행동을 멈추게 했어요.

다시 불사를 여법하게 하여 20년이 지난 지금 제자들에게 승계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그동안도 나는 시주물건은 부처님의 재산이지 나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속가 가족에게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절의 재산에 대해서는 조금치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부 부처님 재산이다. 나는 지금까지 부처님의 은혜, 시주의 은혜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회향하고 대중에게 고맙게 여기기에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 늘 이렇게 말해 왔지요.

예전에 은사스님 말씀이, 법당을 짓는데 시주한 돈이 남더라도 그것을 요사 짓는데 쓰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된다고 했어요. 그만큼 부처님 재산, 신도들의 시주물을 철저하고도 투명하게 관리하고 쓸 곳에 정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제자들에게도 늘 강조합니다. 부처님 재산에 대해서는 관리에 소홀하지 말고, 또 개인사유물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마음대로 써서도 안 된다고요.

내가 예전에 순천 선암사에 있을 때 교도소 법회를 많이 갔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하나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느끼곤 했지요. 장기수 중에서 키가 훤출하고 잘 생긴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어요. 부모가 몸을 잘 만들어 주었는데 정작 본인들이 마음을 잘못 써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와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주제의 법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마음 잘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차를 구입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운전을 잘 못 하면 그 차가 강에 빠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며 사고를 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법을 공부하는 불자들은 어떠한 고난과 장애가 있더라도 그것을 자기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지혜롭게 풀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왕삼매론>은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애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열 가지 지침을 담고 있는 글이지요. 역경에 부딪치거나 경계를 만났을 때 마음을 잘 써서 극복해 ‘걸림돌’을 도리어 ‘디딤돌’이 되도록 긍정적인 마인드와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일깨웠는데 사실 무소유란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는 뜻 이외의 더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갖고 있는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오로지 자기 것으로만 하지 않고 이웃들에게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기능하게 할 수 있으면, 세상의 이익으로 돌려줄 수 있고 잘 회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소유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무재칠시(無財七施)’ 라 하여 누구든지 언제든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소유를 자기 것으로만 알고, 오로지 자기 이익으로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세상에서 얻은 바를 세상으로 돌려주지 않고, 나의 소유가 남의 고통이 되고 세상의 폐해가 되고 자연을 망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불자들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수행이 ‘육바라밀’입니다. 그중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이지요. 보시는 단순히 복을 짓는 일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시를 했을 때, 그 베풂의 행위로 인해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내 본래자리 참성품과 하나됨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고 나서, 또는 베풀고 나서  좋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일 수도 있어요. 주고 나서 마음이 괴롭다거나 ‘내 것’을 잃어 아깝거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지요. 그것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집착이 남아 있는 보시는 기쁠 수가 없습니다.

참된 베풂은 집착이 없는 데서 와요. 집착하지 않아야 맑게 베풀 수 있고, 또한 베풀었을 때 집착을 버릴 수 있어요. 집착은 모든 괴로움의 씨앗입니다. 집착을 놓아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 집착을 놓으려면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반야 지혜를 얻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선 조사들께서는 말씀하시고 있지요.

작지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 보시는 반드시 큰 공덕을 불러옵니다. 남들이 보기에 큰 것, 많은 것만 보시하겠다든지, 이 다음에 재물을 많이 모아서 보시하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마음으로는 평생 남을 위해 보시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자기 형편에 맞게 틈틈이 보시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아무리 훌륭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초발심자경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故로 世尊이 云하사대 我如良醫하야 知病設藥하노니(나는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병을 잘 알아서 약을 베푸나니) 服與不服은 非醫咎也며(그 약을 먹고 먹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又如善導하야(또 좋은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아서) 導人善道호대(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하노니). 聞而不行은(그 좋은 길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非導過也니라(인도하는 사람의 허물이 아니니라).’

나는 어진 의사와 같아 너희들의 병을 하나하나 다 짚어서 진단해 각각의 약을 다 만들어놨는데, 누구에게는 염불이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경이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참선이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주력이 필요하고 등등 다 만들어놨는데 그것을 실행 안 하는 것은 부처님의 허물이 아니다 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말을 해도 자식이 안 듣고 마이동풍식으로 하면 소용이 없지요.

내가 절에 막 들어오니 은사스님께서 <명심보감>을 갖다 주셨어요. 스님께서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서적이지만 성현군자들이 쓴 훌륭한 책이니 공부하라”고 권하셨어요. 마침 그때 한문선생이 와서 배웠지요. <명심보감> 중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있어요.

司馬溫公曰積金以遺子孫未必子孫能盡守(사마온공왈적금이유자손미필자손능진수) 積書以遺子孫未必子孫能盡讀(적서이유자손미필자손능진독) 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以爲子孫之計也(불여적음덕어명명지중이위자손지계야).
사마온공이 말했다. “돈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준다 해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키는 것은 아니며,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준다 해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는 것은 아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덕을 쌓아서 자손의 계책으로 삼느니만 못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만들어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그 자손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또 많은 서적을 만들어 자손에게 물려줘도 그 자손이 그 서적에 있는 내용을 탐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세 번째가 기가 막힌 구절이지요. 덕(德)을 쌓아 자손에게 물려주면 그 덕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오래 오래 지속되고 가장 휼륭한 유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무루복(無漏福)’이다 이 말이지요.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고 아무리 쓰고 써도 바닥이 나지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신도들이 절에 가서 부처님하고 가까워지고 가르침을 실천할 생각은 않고 그저 무조건 복을 많이 달라고만 빕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소원을 비는 기복으로만 흘러가고 있어요. 건강을 달라, 재물을 달라, 승진을 달라, 합격을 달라 등 달라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지으라고 하신 복은 유루복(有漏福)이 아니라 무루복(無漏福)입니다. 무루복은 천 년 만 년 가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도 가져갈 수 없어요. 또, 한번 복을 지어 놓으면 한 생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살아도 변하지 않습니다. 없어지지도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복을 달라고 빌지 말고 복을 지으라, 작복(作福)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복을 짓겠다고 밥 한 그릇 가져다 놓고 태산 같은 복을 달라고 빕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을 짓느냐, 마음을 잘 내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내야 잘 내는 것이겠습니까. 집착하고 보시하면 ‘새는 복’ 즉 유루복이 되지만 집착 없이 아낌없이 줄 때는 새는 것이 없는 무루복이 됩니다. 집착없이 주는 것은 공덕을 쌓는 길이며 받는 것은 결국 되돌려 줄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루복 닦는 일을 회피하고 등한시 하고 있어요.

갑오년 새해는 불자 여러분 모두가 무소유 정신에 입각해 무루복을 많이 짓는 수행정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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