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道仁)스님은용봉스님을 은사로 출가. 보림사에서 보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혜초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일월정사와 천중사, 일본 요코하마 용화사 주지 등을 지냈으며 중앙복지원 부원장과 경기동부교구종무원 지방종회부의장을 역임했다. 2012년 7월 경기동부교구종무원장에 선출됐으며 현재 양평 천인사 주지이며 중앙사회복지원장이다
 
 
    무아· 연기· 중도 체득하고 사는 삶은 날마다 좋은 날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잘 이해하면 불교를 잘 알게 됩니다.
                              부처님의 면모를 잘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지요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이라. “제행은 무상해서 모두가 생멸법이다.”
이는 석가세존께서 설산동자로 수행할 적에 나찰로 변신한 제석천으로부터 들었다는 첫 구절입니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불교의 중요한 핵심이요, 이는 모든 종교의 진리성 여부를 비춰볼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세존께서 이르시기를 “육체는 하나의 거품덩어리와 같고, 감각은 날려간 물방구와 같고, 지각은 지속성 없는 신기루 같고, 의지적 형성력은 알맹이 없는 파초와 같고, 의식은 허깨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경계, 육진, 육근, 육식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말씀하시고 그 어떤 것도 영원불멸한 것은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다고 일러주셨지요.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오온이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아 모든 고액(苦厄)을 벗어난다고 하셨듯이 모든 현상(주객 등 일체)은 연기(緣起)에 의해 생겨나고 연기에 의해서 멸한다는 대승불교의 공(空)도리이기도 합니다. 무상과 무아라는 연기 도리를 얘기하면 우리는 무(無 )라든가 허무(虛無)를 생각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공(空)도리 즉 연기법은 있다 없다 또는 창조 파괴 등의 유무 등의 이분법이 아닌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의 연기도리로서 이론이 아닌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불교는 어떤 신이 세상과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는 창조론과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생주이멸 생로병사가 연기법으로 무한 영원히 돌아간다는 뜻이니 여기에는 창조신 내지 창조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오늘날 과학도 대부분 불교의 생명론 우주론인 연기법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한세계 무한생명 무한마음이 연기적으로 무상하게 즉 공(空)하게 생멸생사 하면서 영원세월을 시작도 끝도 없이 연기적으로 생하고 멸하면서 나투고, 숨고, 숨고 나투고, 생하는가 하면 사(死)하고, 사(死)하는가 하면 생(生)하면서 연생연멸 즉 무상하게 돌아간다고 불보살님들께서 말씀해 주셨지요.

모든 현상이 공(空)하다는 즉 무상무아의 연기도리는 참으로 진리라서 꽃이 지는가 하면 열매가 맺는 성숙이 있고,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도 하며,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되기도 하고, 고(苦)가 있는가 하면 고(苦)의 소멸이 있으며, 선(善)이 악이 되기도 악이 선이 되기도 가능한 것이며, 중생이 부처가 됩니다.

부처님께서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이라는 엄청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생사생멸하며 무상하게 연기적으로 돌아가는 이 고리를 끊기 위해 목숨 던져 구한 한 마디가 “생멸멸이(生滅滅已) 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즉 생하고 멸하는 이것이 적멸해지면 열반의 즐거움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세냐?  “인욕(忍辱)”
                                    무엇이 가장 이로운가?  “무병(無病)”
                                    누가 제일 부자인가?  “지족(知足)하는 사람”
                                    제일 친한 사람은?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주는 친구”
                                    세상에서 최고의 낙(樂)은?  “도를 깨쳐 알고 열반에 드는 것”




부처님께서 지관(止觀)의 명상을 깊이 닦아 구경무아(究竟無我)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생사심이 끊어진 적멸의 경지에 도달해 보니 세계와 대상, 몸과 마음이 무상하더라, 즉 연생연멸해서 집착할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중생이 ‘본래부처’이고 법계의 모두가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세계인 법화 화엄의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 없이 자재(自在)한 모습으로 너와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님을 철저히 알아서 나툼 없이 널리 나투는 대 보현보살행이 저절로 펼쳐지게 됩니다.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제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상이라).
佛者行道已 來世得作佛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닦아 행하면 내세에 부처 되리라).
생과 멸이 있으면 그 끝은 어디인가? ‘환지본처(還至本處)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 했습니다. 법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 ‘갔다’라는 표현 대신 ‘돌아가셨다’라고 합니다. 이 몸뚱이를 벗고 나면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사람이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태어나는 것과 같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과 같습니다. 구름 자체가 실다움이 없으니 오고 감이 똑같습니다. 지금 숨을 쉬고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이놈’은  어떤 것인가요? 바로 한 달 전 하안거 들어가서 제방에서 열심히 정진하는 납자들이 파고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인연설을 믿습니까? 인연은 질서의 원칙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이렇게 법당에 앉아 있는 것도 분명히 인연의 소산입니다. 신령스런 참마음이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러면 아는 자는 알고, 모르는 자는 모르는 것이라 한다면 여기에 갈등이 생깁니다. 제가 요사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이해가 무엇인가요? 이심전심 소통입니다. 자기 눈높이로만 보고자 한다면 이해가 생길 수가 없지요. 불평불만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이해가 전제가 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이치와 말을 꿰뚫어서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이해(理解)’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중 하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삼계유심이요, 과거 현재 미래가 한마음, 전생과 내세가 한마음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마음에 있고 일체 모든 만법 진리가 의식 안에 들어있어요. 일체만법이 마음 안에 다 들어 있으니 바로 이것이 일체유심조라. ‘마음이 부처’입니다.

보통 불공을 드린다 하면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하게 하는 일인 줄 알고 있습니다. 불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불공입니다. 그런데 잘 안 되는 까닭은 하나를 얻으면 둘을, 둘을 얻으면 셋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허망한 경계에 치우쳐 그것에 의지해 구하려고 하니까 병통입니다. 그렇게 본래마음을 잊어버리고 욕심에 휘둘려서 자꾸 그렇게 되니 문제이지요.

평생을 묵언으로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도인(道人)으로 살았던 계룡산 석봉스님에게 유일하게 전해오는 ‘다섯 가지 제일 법문’이 있습니다. 스님이 하루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누가 가장 세냐?”고 물었어요. 사람들은 왕(王)이나 천하장사, 심지어 호랑이라고 답했어요. 많은 대답을 들은 스님은 고개를 흔들고는 “인욕(忍辱)이 가장 강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가장 이로운 것이냐?”라는 물음에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 지위…”라고 대답하면 “건강을 잃고 병이 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병(無病)만큼 이로운 게 있겠는가”라고 깨우쳐 주었지요. 또 “누가 제일 부자냐?”는 물음에 사람들은 왕이나 갑부들의 이름을 댔어요. 그러나 석봉스님은 “제일 부자는 지족(知足:분수를 지켜 만족함을 아는 것)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제일 친한 사람은 누구이겠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부모형제나 나를 잘 이해해주는 친구”라고 했지만 스님은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주는 친구”라고 했고, “세상에서 최고의 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예쁜 여자를 거느리고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다, 도를 깨쳐 알고 열반에 드는 것만큼 큰 낙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가 한두 가지씩 생활의 지표와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빈 몸으로 와서 한생을 살다가 죽음의 강을 건너 떠나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지족(知足)’의 삶으로 넉넉함을 알고 낙을 삼아 열반에 들 수 있다면 그 무엇을 더 바랄게 있겠습니까. 여기 나 또한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 내 것이라는 것도 없으며, 잠시 잠깐 쉬었다 가는 나그네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맨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기특하고도 기특하구나. 일체중생이 여래 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지만 분별망상으로 인하여 증득치 못함이로다.”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이다, 우리의 참모습이 본래부터 부처님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분별망상으로 인해서 부처의 삶을 살지 못하고, 깨달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리 중생이 번뇌 망상 때문에 이렇게 중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적으로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착각으로 인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몸과 마음. 즉 오온을 나라고 실체시 합니다. 이 몸과 마음, 즉 오온이 실재한다고 착각하면 어쩔 수 없이 탐심작용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탐욕 때문에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짜증이 나고 미워하고 화를 내는 등 진심(嗔心)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탐진치로 말미암아 번뇌망상이 계속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마치 꿈꾸는 사람이 꿈을 꾸면 꿈속에 내가 있고, 세계가 있고 꿈속의 내가 꿈속의 세계에서 희로애락을 실감나게 느끼며 꿈속의 모든 것들이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꿈을 깬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꿈의 세계는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잘 이해하면 불교를 잘 알게 됩니다. 부처님의 면모를 잘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지요. 
무아, 연기, 중도를 체득하고 사는 삶은 매일 매일이 좋은 날입니다. 우리 존재가 본래 부처였음을 알면 생로병사마저도 진리로 바라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본래부처’ 자리를 알면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사라지고, 남을 돕는 일이 나를 위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부처님 법은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평상시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원력을 세우고 날마다 수행 정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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