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업자득과 인과응보의 법칙을 철저히 믿으십시오

동우(東佑)스님
"지금의 나와 가족, 우리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며 귀한 사람인가를 깨달으면 악한 일을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고 누구를 원망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지중한 인연을 소중히 여겨 우리의 참된 가치를 한시라도 잊지 말고 악업을 멀리 하고 선업을 행하는 데 게을리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루에 한번이라도 육바라밀을 실천한다면 지옥고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아귀도와 축생도가 어디 있을 것입니까"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전국에 있는 불자들이 각기 마음속의 소원을 담아 부처님 전에 연등을 밝혔습니다. 흔히 우리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불교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이 과거에 지어놓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 따라 그 화(禍)와 복(福)의 갚음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일을 알고자 할진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의 일을 알고자 할진대 현재 자신의 행위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곧 선(善)한 업에는 행복이 따르고 악(惡)한 업에는 불행과 근심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초파일날 부처님 전에 올린 연등 하나 하나의 인연이 선근(善根)의 씨앗이 되어 이내 자신을 깨달음과 성불(成佛)의 길로 이끄는 공덕이 됩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악한 일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물불 가리지 않고 독하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세보(三世報)라 하여 이미 지어놓은 업은 당장 받지 않더라도 반드시 금생 혹은 내생에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어요.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고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니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악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악한 자도 복을 만난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었을 때
악한 자는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선한 이도 가끔 화를 만난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익었을 때
선한 사람은 복을 누린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법을 설하시면서 300여 회의 경론을 담론하신 말씀이 삼장(경장, 율장, 논장), 십이부, 팔만사천법문으로 섭수되었는데 이는 모두 인연생기(因緣生起)의 근본 교의(敎義)를 벗어남이 없어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연기법도 ‘인연생기’의 줄임말인데 인연생기란 우주법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 소멸된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인연은 어떤 인연인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우주법계를 여섯 갈래로 나누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 인과응보에 따라 유전하는데 이 여섯 갈래 길을 육도라 하며 이를 하염없이 돌고 도는 것을 육도윤회라 합니다. 이 육도는 지옥도·아귀도·축생도·아수라도· 인간도·천상도를 말하며 이들 중 앞의 지옥·아귀·축생 도는 악한 업을 행한 과보로 태어나는 고통스럽고 박복한 세계라 해서 삼악도(三惡道)라 하고, 뒤의 아수라·인간·천상 도는 악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다복한 세계라 하여 삼선도라 합니다. 그런데 교파에 따라 삼선도에서 아수라도를 제외하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가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로서 다른 곳은 몰라도 이 삼악도만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이 오죽하면 우리가 늘 독송하는 <천수경>‘여래십대발원문’에서도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라는 구절이 나오겠습니까. 즉, 영원히 삼악도와 이별하기를 발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들어서 선근(善根)의 씨앗을 심어 수행정진으로 깨달음을 증득하여 비로소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수승한 공덕으로 천상계는 못 갈지언정 삼악도만큼은 영원히 이별하도록 평소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생을 받고 또 받아오는 가운데 한량없는 죄업을 지어온 탓에 사람 몸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 몸 받기 어려움을 비유하여 눈 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물위로 머리를 내어놓는데 이때 마침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 잠시 쉬는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년 만에 한번 물속에서 올라와 망망한 넓은 바다에서 구멍 뚫린 판자를 만나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니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지요. 그래서 사람 몸 받기 어렵고 설령 사람 몸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아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말씀을 듣는 지혜를 갖추었으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이 인연을 얻은 것은 세세생생 이 진리의 법에 우리가 선근공덕과 좋은 인연을 심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살고 못 살고 웃고 우는 것이 모두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인과응보이며 지금의 나와 가족, 그리고 우리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며 귀한 사람인가를 깨달으면 악한 일을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고 누구를 원망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분들은 이 지중한 인연을 소중히 여겨 우리의 참된 가치를 한시라도 잊지 말고 악업을 멀리 하고 선업을 행하는 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이야기를 한편 들려드리겠습니다. 당시 시인이자 정치가로 이름 높았던 백낙천이란 분이 항주 자사(刺史)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그리 멀지 않은 사찰에 ‘조과도림’이라는 이름난 노스님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낙천은 “한번 시험해 보리라” 마음먹고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갔습니다.

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했는데 마침 백낙천이 찾아간 날에도 소나무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낙천이 선사를 올려다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선사의 모습이 너무나 위태합니다.” 라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네가 더욱 위태하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낙천은 어이가 없어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랐고 또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는데 무엇이 위태하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자만이 대단함을 알고 이 기회에 그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고자 “티끌 같은 세상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백낙천은 자기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는 선사의 지혜와 더불어, 자사 라는 높은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선사의 기개에 눌려 애초 선사를 시험하려던 불손한 마음을 거두고 “제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하고 청했습니다. 선사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일갈하였습니다. 즉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뜻입니다.

대단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낙천이 이같은 대답에 실망하여 “그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니오?” 하고 신통찮다는 듯이 말하자 이에 도림 선사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네” 라고 말했지요. 백낙천은 이 말을 듣고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어 그 자리에서 조과도림 선사에게 귀의하여 이후 불법수행을 돈독히 하였고, 말년에는 출가하여 불제자로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비록 금생에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아 불법을 만났으니 우리는 글과 지식으로만 아는 불교가 아니라 실천하는 불교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고 실천하지 않으면 오히려 아만과 번뇌만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부처님 당신과 한 치도 다름없이 똑같은 성품, 즉 불성(佛性)을 본래 지니고 있다고 하셨어요. 다만 우리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우리의 참 마음을 찾지 못할 뿐이지요. 그래서 옛 조사스님들과 선지식께서는 “우리 모두가 본래부처요, 성불한 존재” 라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금강경>에 ‘사구게’가 있지만 <법화경> 방편품에도 다음과 같은 참으로 좋은 사구게가 있습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즉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제나 저절로 적멸한 모습이니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하면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고통이 없는 삶이요, 상처받지 않는 삶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다고 복 받은 부자가 아닙니다. 식구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집에 살고 돈이 많다 하여도 결코 잘 사는 가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업과 인과의 도리를 깊이 생각하고 우리 가족과 주위에 있는 사람 사람들이 모두가 귀한 존재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나와의 소중한 인연을 깨달아 간다면 행복은 우리 곁에 상주해 있을 것이며 필경에는 적멸의 도리를 깨쳐 성불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번이라도 육바라밀을 실천한다면 지옥고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아귀도와 축생도가 어디 있을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그 과보를 받으니 그 가운데 행복도 불행도 있고, 지옥도 극락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업자득, 인과응보, 육도윤회의 법칙을 철저히 믿고 신심과 정성으로 수행 정진하여 악업을 소멸해 간다면 삼악도와는 영원히 이별할 것이며 세세생생 광명의 빛 속에서 불법(佛法)의 큰 바다로 들어갈 것입니다.

불자님들 모두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소의 뿔과 같이 굳건한 신심으로 보살도를 실천해 나가시기를 축원 올립니다.

동우(東佑)스님은 예산 수덕사에서 김대은(태흡)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3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68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8년 이남허스님에게 입실 건당했다. 충남교구 종무원장과 종회의장, 사정원장을 지냈으며 총무원의 사회·재무·교무·교임·문화 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제 9·11·12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다. 현재 고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충남 서산 송덕암에 주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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