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왕재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남 따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내서는 안 됩니다. 재를 지낸다는 자체가 곧 불법이요 성불(成佛)이며 정등정각의 인(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항상 방생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방생을 권해야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방생한다면 자비종자를 키우는 일이며 삼계의 고통을 쉬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법진(法眞)스님은 1955년 천장사 입사. 58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능인선원에서 6안거 성만. 67년 해인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68년 해인승가 대학졸업.78년 태고종 남허스님에게 입실. 96년 수다원 원장. 종무위원과 법규위원,해인승가대 총동문회 부회장, 중앙종회의원 등 역임. 현재 서울남부교구종무원장이며 보운사 및 태안 보타락가사 회주로 있다.

문종성번뇌단(聞鐘聲煩惱斷)
종소리에 번뇌가 소멸되고
지혜장보리생(智慧長菩提生)
지혜 속에 정각을 이룬다네.
이지옥출삼계(離地獄出三界)
지옥이라 삼계고통 없어지니
원성불도중생(願成佛度衆生)
부처되어 모든 중생 제도하세.
옴 가라지야 사바하(破地獄眞言)
지옥아, 부서져라! 지옥아, 부서져라!
지옥아, 부서져라!

모든 법회가 시작되기 전에 언제나 종을 먼저 쳐서 울립니다. 왜 제일 먼저 종을 울릴까요·
우리네 사바세계 중생들은 밝은 태양 속에서도 두려움과 가난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번뇌 속에서 그리고 업장이라는 어두운 장막에 가려 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하는 발원부터 하는 것이지요.
위의 처음 두 구절은 우리 중생들의 발원이고 다음 두 구절은 무형유식(無形唯識)의 중생을 위한 간곡한 발원입니다.
음력정월에는 각처에서 용왕재(龍王齋)를 올립니다. "재(齋)"란 원래 범어 우포사다(Uposadha)를 번역한 말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조심하여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지요. 그러다가 음식을 마련 여러 사람들에게 공양하는 것을 "재"라고 하였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도 재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죽은 이를 천도하는 의식을 재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민속신앙에서도 용왕의 신앙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유교에서도 제천에 고사를 올리려면 청정수를 제일 먼저 올렸으며, 기독교에서도 비록 용왕은 경이원지(敬而遠之)하지만 물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용왕의 기(氣)로 업연을 씻어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돼야 하며 기도는 천지 만물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용왕재를 올리는 깊은 뜻도 알고 보면 업장을 소멸하고
                            보리(菩提)를 증득하고자 함입니다.
 

雨順風調民安樂(우순풍조민안락)
天下泰平同一家(천하태
평동일가)
원하옵나니 비바람이 순조로워 온 백성이 활기 넘치게 하여주고,
천하가 태평하여 웃음꽃이 만방(萬邦)가득하게 하여 주십사 하는 소원인 것입니다.

혹 용왕재나 산신재 지내는 것이 잡신(雜神)을 모시는 것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재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천지에 가득한 신중님(산신, 조왕신, 용왕신, 해신, 달신, 물신, 불신 등등)도 갈마들여 보면 금강역사의 신중사대천왕으로부터 제불보살로 하여 결국에는 모든 것이 중생들을 위하여 나투신 석가여래의 화현입니다.

계사년은 뱀의 해입니다. 평소 사람들은 뱀을 그리 좋은 쪽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럽게 여기고 피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외국에 가보면 간혹 부처님께서 사좌(巳座)에 앉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금강신중님을 보면 독사영락 요신비(毒蛇瓔珞 繞身臂)라 하여 허리에 독사 여섯 마리를 감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앉으신 사좌(巳座)는 중생들의 삼재[三毒]를 상징하고 여섯 마리 뱀은 육도중생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경전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새, 비둘기, 뱀, 사슴 등 동물 네 마리가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제일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새는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큰 고통이기에 죽음의 그물이나 화살 등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했어요. 비둘기는 음욕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하면서 음욕이 치성할 때면 죽음도 잊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뱀은 성내는 진심(嗔心) 참기가 가장 힘들다고 하면서 성질이 불같이 일어나면 부모도 형제도 선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독을 뿜어 죽인다고 했어요. 사슴은 항상 두려움이 서려있어 견디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풀 한 포기 먹으려 다가가도, 또 물 한 모금 마시려 하다가도 포수나 사나운 짐승이 무서워 항시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오통비구가 있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다만 가지만 이야기한 것이고 뿌리는 말 하지 않았다. 천하의 모든 고통은 몸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고통의 근원을 깨우치면 곧 열반이 성취될 것이다. 열반의 도는 모든 집착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괴로움 자체가 없느니라."
어찌 이 태란습화(胎卵濕化)에 비유한 네 짐승의 이야기라고 결론지어 마감하겠습니까.
용왕재나 산신재 등, 할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라도 복을 짓는 이러한 행위는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왜일까요· 몸이 있고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일부이긴 하지만 소위 큰스님을 자처하면서도 용왕기도나 산신기도 하는 것을 비웃는 스님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분들도 당장 한 끼만 굶어도 정신이 혼미하며 제 허물도 벗지 못한 주제에 말입니다. 용왕재를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남 따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내서는 안 됩니다. 재를 지낸다는 자체가 곧 불법(佛法)이요 성불(成佛)이며 정등정각의 인(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살생(殺生)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 되지요. 특히 불자라면 누구나 살생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먹물 옷을 입고 살생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악(惡)을 짓는 것입니다.

용왕재를 지내면서 방생(放生)을 합니다. 불교의 계율은 청정한 삶을 유지하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입니다. 그 가운데 살생을 금지한 불살생계(不殺生戒)는 가장 중시되는 계율이며, 방생은 불살생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즉 살생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죽게 된 생명을 구해냄으로써 보다 넓은 의미의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방생은 불자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하는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항상 방생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방생을 권해야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방생한다면 자비종자를 키우는 일이며 삼계의 고통을 쉬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남의 목숨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일을 태연하게 행한다면 불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한 잔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수복강령(壽福康寧)을 바라며 병고액난의 소멸을 바랄 수 있을까요· 나무아미타불! 불자들은 방생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생[胎卵濕化]의 자부(慈父)로서 중생을 연민히 여기사 살생을 금하셨고, 살생을 하면 벗어날 수 없는 업보가 있다는 인과를 누누이 말씀하셨어요. 세계기시(世界起時)서부터 성주괴공(成住壞空)까지 모든 것이 다 업연의 소치라고 하셨습니다. 업연이라는 자체는 자기가 지은 것을 스스로 거두는 것입니다. 업연은 상대성이 있기에 성립이 되며, 성립이전의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근본을 모르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합니다. 무명에는 근본 무명과 지말 무명이 있어 이것이 탐진치 삼독의 체가 되는 것이며, 무명으로 인하여 번뇌가 있고 번뇌로 인하여 무명이 있어 이것을 총체적으로 업(業)이라고 하며, 또 근본으로 야기된 것을 업연(業緣)이라고 합니다. 이 업연에서도 간접적인 업연과 부차적인 업연이 있는데 실상(實相)과 가상(假相)이 모두 이 업연으로부터 반연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유정무정이 다 무명업식(無明業識)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일체중생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무명이라고 하는 그 존재 뒤에 업연의 법칙으로서 생주이멸(生住離滅) 즉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 것입니다.

<범망경>에 보면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와 사미 10계, 보살 48경계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 십선법계, 삼취정계 등 많은 계율이 있는데 모두 "살생을 하지마라"가  수위를 차지합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마라!" 이 말을 깊이 음미해 보세요. 얼마나 거룩한 말씀입니까.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진나라 때 어떤 사람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원숭이 새끼와 어미가 있었는데 예쁜 새끼만 데리고 가게 되었어요. 그는 친구와 함께 원숭이 새끼를 안고 말을 타고 수십 리를 달리다 뒤돌아보니 원숭이 어미가 사력을 다하여 좇아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원숭이 어미의 애타는 마음보다는 새끼를 쫓아온다는 것에 흥미를 갖고 더욱 말에게 채찍을 가해 달렸습니다. 한참 달리던 두 사람은 어미 원숭이가 좇아오지 않자 이상히 여겨 말을 되돌려 가보니 어미가 죽어 있었습니다. 배를 가르고 보니 원숭이 어미의 배속 창자가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고 안타까웠으면 창자가 다 찢겨졌겠습니까· 미물도 이러할 진데 하물며 중생이 처참하게 죽는 것을 가엾고 안타깝게 여기는 부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불교에 입문하면 모두 5계를 수지합니다.  "살생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습니다. 삿된 음행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지 않겠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5계를 제대로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지킬 수 없는 계는 받을 수 없다고 해 유보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계를 지키는 것은 옷이 몸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삿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얻는 청정한 마음은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고, 끝없는 고통으로 인해 번민하는 중생에게는 고통으로 가는 출구를 막는 단단한 방어문이자 방호벽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의 목숨, 일체의 생명을 자기의 목숨처럼 아끼면서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될 수 있음은 물론 가피를 받아 어떠한 소원도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사진설명: 법진(法眞)스님은 1955년 천장사 입사. 58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능인선원에서 6안거 성만. 67년 해인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68년 해인승가대학 졸업. 78년 태고종 남허스님에게 입실. 96년 수다원 원장. 종무위원과 법규위원, 해인승가대 총동문회 부회장, 중앙종회의원 등 역임. 현재 서울남부교구종무원장이며 보운사 및 태안 보타락가사 회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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