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억울한 일들이 많다. 각 개체의 처지에서 보면 생로병사의 이법(理法)대로 순치된 삶보다 분통 터지는, 또는 억장이 무너지는 고난과 역경의 현실이 더 많이 전개될 수도 있다.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생명을 잃었거나, 세월호 참사 사건의 당사자라고 생각해보라! 사고나 자연재해를 당해 죽는 사람은 부지기수요, 아무 죄도 없이 재판까지 받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들, 아예 불문곡직 찔려죽고 총살당한 사람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 어둠 속에서 칼맞은 것처럼 영문도 모르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까지, 열거하자면 전 세계 도서관의 역사책들을 방불케 할 것이다. 실록에는 눈물이 계속 흐르는 안구증 환자였던 조선시대 형조좌랑 김빙이 정여립 국문장에서 눈물을 흘리다, 역모자를 동정한 것으로 오인 당하여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는 웃지 못할 기록도 있다. 억울함의 이면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상호의존성, 인과법칙, 관계 속의 오해와 착오, 개인과 민족의 업습과 파장 등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당사자들의 억울함을 납득시키기에는 여전히 시원치 않다.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힌두교 전통에서는 개인의 불행과 고행을 업장 닦는 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당신이 기가 막히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이를 업보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중국 명나라 때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론』 제십구는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 하지 말라(被抑不求申明)”는 것이다. “억울함을 밝히려 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는 것”이다.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받아 들이기도 어렵고 논의의 소지도 많은 구절이다. 『잡아함경』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라고 강조한다. 두 번째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방관·포기·절망·분노·맹목적 수용·절규로 괴로움에 대응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깊은 통찰이다. 『명심보감』 「성심(省心)」편 ‘왕참정’의 <사유명>은 다음과 같은 통 큰 동체대비의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당신이 지금 억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면 한번 새겨보라. “여유 있는 재주를 다 쓰지 않았다가 조물주에 돌려주고 여유 있게 복록을 다 쓰지 않았다가 조정에 돌려주며, 여유 있는 재물을 다 쓰지 않았다가 백성에게 돌려주고 여유 있는 복을 다 누리지 않았다가 자손에게 돌려줄 것이니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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