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흔들림을 보고 바람을 안다
나뭇잎의 흔들림을 보고 바람을 안다
나의 흔들림을 보고 나의 바람을 안다
꽃을 흔들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너를 흔들고 나를 흔드는 바람
내가 흔들리기 전엔 네게도 바람이
있는 줄 몰랐다
네가 흔들리기 전엔 내게도 바람이
있는 줄 몰랐다
원시인들에겐 원시인들의 바람이
유목민들에겐 유목민들의 바람이
슬픈 열대엔 슬픈 열대의 바람이 불었을 거다
바람은 비를 사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 사선 속에선 나도 사선으로 흐른다
사선으로 흐르는 동안
내 안에 그렇게도 많은 사선이 있음을 비로소 안다
그 사선의 힘으로,
바람의 힘으로,
내가 살고 있음도 비로소 안다
꽃의 흔들림을 보고
나뭇잎의 흔들림을 보고
사선의 비를 보고
너와 나의 마음 안에도 바람이 살고 있음을 알겠다
사선이 살고 있음을 알겠다
바람 안에 바람이 살고 있음을 알겠다

-이 시를 쓰다가 문득, 서정주의 「자화상」이 생각났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중략) //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중략)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의 「자화상」 부분>

그래, 언제부턴가 나도 내 안에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나를 (팔 할 이상) 키워왔다는 사실을 사실로 확인했다. 그 바람은 반백도 훨씬 더 산 내 몸 안에 아직도, 끊임없이, 불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를 키우고 있다. 그 바람이 내 남은 삶을, 인생을 어떻게 영글어가게 하고, 어떻게 낙하하게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바람의 삶을 죽는 날까지 살고 싶다. 나는 진짜 바람이므로.

이 시를 쓰던 날은 마침 첫눈이 내렸다. 바람도 없는 첫눈이었다. 관음(觀音) 같은 그 첫눈에게 나는 이 시를 바쳤다. 그리고 미당(未堂)의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누가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누가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도,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어느덧 경자년(庚子年) 끝자락이다. 지난 한 해, 우리, 모두, 참, 힘들었다. ‘코로나19’ 바람이 우리를 너무도 휘청거리게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바람은 우리를, 세계를 완전히 각성시켰다. 모두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삶을 되짚어보게 했다. 그리고 다시 여물게 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새해에는 그 바람 속에서 ‘자신의 바람’을 재발견하고 대해(大海)의 고해(苦海)를 ‘소’처럼 잘 헤쳐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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