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동안 독송 되었던 『금강경』 사구게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꿈·환·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 불빛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다. 같은 경전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모든 형상이 있는 것

들은 허망한 것이며, 형상들이 실체가 아닌 것임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도 같은 맥락에서 오랫동안 묵상 되어 왔다.

『금강경』 이후, 『해심밀경』 등 유식학 경전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를 마음에 비치는 표상(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대승경전뿐 아니라 초기불교의 『아함경』에서도 핵심교리인 오온(五蘊)을 설파할 때, 색(色, 몸)은 물방울, 수(受, 느낌)는 물거품, 상(想, 생각)은 아지랑이, 행(行, 의지)은 파초잎, 식(識,인식)은 허깨비로 비유한다. 요컨대, 이러한 경전들의 요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 혹은 우주가 실체가 아닌 허망한 것이라고 공통으로 통찰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브라이언 그린이나 마이클 탤보트 같은 현대의 탁월한 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램이라는 가설이 가

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실재라고 느끼는 우주는 실재가 아니고 하나의 홀로그램, 망념(妄念)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정신·세계·우주 등의 실체를 잘 모르면서 3차원 입체상인 거울 속의 존재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사랑과 증오, 거리의 건물, 부모와 자식·이웃과 친구 간의 갈등, 결핍, 쓰나미, 가뭄과 홍수, 태풍, 배고픔, 처절한 전쟁, 뼈가 욱신거리는 통증, 배신, 약탈과 유린, 강간·살인 같은 참혹한 범죄들을 단지 꿈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홀로그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월창 거사가 남긴 『술몽쇄언』은 여전히 오매소몽(寤寐小夢) 사생대몽(死生大夢)이라고 중얼거린다. 잠자고 깨는 것은 작은 꿈이고, 죽고 사는 것은 큰 꿈일 뿐이니, 생사몽각(生死夢覺) 모두가 환상일 뿐이라는 거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또 남아 있다. 꿈이 아닌(혹은 꿈을 꾸는 주체인) 항구불멸의 ‘참’이 따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참’이 꾸는 크고 작은 꿈을 꿈속의 등장인물인 우리가 어떻게 수 놓아야 할 것인가이다.

-소설가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