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융합은 어떻게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나③

1917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 창립됐을 때 최고직 교정에 올라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도 7명의 교정 중 한 분으로

사(師)는 다시 선암사에 계단을 재수(再修)하고 계율을 진작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침침연(浸浸然)한 시대사조는 액회(厄會)의 조선불교의 심곡(深谷)에까지 몰려와서 사회진출의 기운을 방동(方動)케 하고 포교당의 도시진출이 호답(呼答)의 상(狀)을 정(呈)함에 전남 순천의 선암(仙巖) 송광(松廣) 양사는 순천읍 환선정(喚仙亭)을 매득(買得)하여 포교당을 창설하니 여기서 일반대중은 누구보다도 사의 입전수수(入廛垂手)를 간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경운이 임제종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는 강학과 사경을 주로 한 강백이었지만 원종에 맞서 1911년 조선불교임제종운동이 일어났을 때 임시 관장으로 추대되었다. 임제종이라는 명칭은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선의 대명사로 봐도 될 정도로 선의 색채가 강한 개념이다. 물론 운동이라는 명칭에서 짐작되듯이 임제종 운동이 선보다는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에 무게중심을 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김경운이 선은 물론이고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해서까지도 융합적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제종운동은 원종이 일본의 조동종과 굴욕적 맹약을 했다는 알려진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는데, 김경운이 원종 성립 초기에 운영진으로 참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원종은 설립되며 6개 부서를 두었고 그 중에 서무부장을 김석옹(金石翁), 강대련(姜大蓮)이 맡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김석옹이 바로 경운 화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원종에서 서무부장을 맡은 김석옹은 조선말의 화승이었던 석옹철유(石翁喆侑, 1851~1917)라고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김석옹을 검색해 보면, 1915년 04월 27일 제817호 기사의 주지이동 소식란에, 함경남도 영흥군 덕흥면 안불사 김석옹의 주지 취직 및 인흥면 지흥사, 의흥면 운주사와 견성암, 복흥면 운수사 주지를 겸무하도록 인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정황을 모두 고려해봤을 때, 특히 활동지역과 이력을 볼 때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오는 김석옹이 화승 석옹철유이고 그가 당시 김석옹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원종 서무부장 김석옹은 경운화상이 아닌 석옹철유일 가능성이 크다. 1911년 1월 조선불교임제종운동이 일어났을 때 임시 관장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이 그로부터 불과 2년 전까지 그 대척점에 있던 기관인 원종의 운영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김석옹이 경운 원기 화상으로 오해된 데는 대부분의 연구성과물에서 근거자료로 삼고 있는 이능화의 『한국불교통사』의 해당부분이나 1908년 3월 17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불교종무국취지서」에 ‘김석옹(金石翁)’이라고만 적혀있는데서 기인한 것 같다.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佛紀二千九百六 十三年 丙子 五月二十一日. 大乘巖主人 八十五歲沙門 戱筆.번역불기 2963년 병자 5월 21일 대승암 주인 85세 사문 붓을 놀리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佛紀二千九百六 十三年 丙子 五月二十一日. 大乘巖主人 八十五歲沙門 戱筆.번역불기 2963년 병자 5월 21일 대승암 주인 85세 사문 붓을 놀리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임제종운동 이외에도 김경운은 반일 민족주의 경향을 띠는 불교운동의 대표로 꾸준히 추대되었다. 1917년에 경성 각황사에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 창립되었을 때 그는 최고직인 교정(敎正)에 추대되었고, 1929년 1월에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도 7명의 교정 가운데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특정 불교전통이 아니라 불교 전통 전반에 대해 융합적 태도를 취한 것은 선암사의 가풍임과 아울러 경운화상 개인의 성향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구한말 외부의 엄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불교 내부의 이론과 수행 전통의 차별성 보다는 선과 교학 정토 등 모든 불교 전통을 함께 모아 엮어 현실세계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조선불교의 내실화와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 강화라는 두 지점을 중심으로 김경운의 융합적 불교관이 공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경운에게서 보이는 이와 같은 사회참여적 경향은 삼교융합에서 볼 수 있었던 유학적 가치관과 세계관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세상의 구원과 같은 문제의식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특히 부각되었는데,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신분과 무관하게 유학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유불도 삼교의 지성인들이 자신의 이론적 전통을 지닌 체 사회적 책임과 역할의식이라는 유학적 가치관으로 모여드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경운의 교유관계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보면 그 당사자들이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고, 특히 지식인의 대사회적 사회적 책임을 무겁게 생각한 인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면면을 보면 매천 황현(1855~1910), 이건창(1852~1898), 김윤식(1835~1922) 등이 확인된다.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가[難作人間識字人]”라는 매천의 마지막 절창은, 매천 개인의 소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김경운과 교유했던 당시 지식인들이 함께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 책임의식의 정체를 정확히 보여준다.

선암사의 가풍은 특정 불교 전통이나 수행법을 천착하거나 지켜나가기보다는 여러 전통을 융합하여 실제적으로 조선불교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는 30본산 중 하나로 호남지방에서 조선불교의 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예로부터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호남지역의 정서가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경운의 생애와 이력을 보면 그가 이러한 선암사의 가풍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불교계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지켜내는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불교전통은 선교융합이나 임제선의 기치를 들고 세력을 모았다. 이러한 정황을 간략히 짚어낸 한 학자의 통찰을 상기해 본다. “우리는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임제라는 이름은 식민지 당시 한국의 선불교도들에게 이만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불교계의 개혁 운동과 민족 운동으로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와 같은 기조의 대표적인 사례가 선암사 가풍에서 확인되고 그 가운데 한 인물을 특정한다면 김경운 화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Ⅳ. 『사문일과(沙門日課)』의 융합적 불교관

현재 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에는 경운화상의 저술로 『사문일과(沙門日課)』(S26304)라는 제목의 문헌이 소장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문헌으로 『안락와사문일과경게(安樂窩沙門日課經偈』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古 1730-70, 1책 57장), 그리고 아단문고(古1730-70) 등 세 곳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문헌들은 그 체제와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체제와 내용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이나 세밀한 분석은 관련분야 전문가의 연구성과를 참조하면 된다. 여기서는 이 문헌에서 드러나는 선암사 사중의 전통 내지는 경운화상의 흔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단국대학교 소장본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문헌과는 달리 이 책의 소장자가 바로 경운화상이었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문일과』는 6권 1책으로 구성된 문헌이다. 표지에 『사문일과』라는 제목과 함께 지장경, 행원품, 찬불게, 미타경, 발원문, 찬관음문의 순서로 목차가 순서대로 함께 나열되어 있으며, 우측 하단에 ‘경운(擎雲)’이라고 적혀있다. 글씨체로 보아 표지를 경운화상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책의 안쪽 여러 곳에 그의 인장이 찍혀 있고, 책 밑면에도 ‘경雲’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봐서 경운화상이 이 책을 직접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동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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