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언명하였다.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와 있는 일체중생은 유정물·무정물이다. 유정물·무정물은 사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동물·곤충·세균·식물·광물질을 망라한다. 그래야 일체중생이다.

불성은 부처를 이루는 근본 성품이자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일체중생에게 나투는 불성은 곧 생명이다.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미물과 흙과 돌에도 생명이 있다. 식물들의 생장작용은 눈에 보인다. 뇌가 없는 바다 가재도 생명이 있어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먼지 덩어리인 별들은 수소나 헬륨같은 것을 먹고 자족성과 자생성을 누리면서 수십억 년을 평화롭게 살다가 초신성이라는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광물질이 입자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불성이 생명으로 나툼에는 강약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법기(法器)도 다르다. 우주가 춘하추동[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순환하지만, 원상(元象)이 드러남에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처럼 계절 구분이 명확한 곳도 있지만, 북극처럼 모호한 지역도 있다. 그러나 춘하추동은 인간의 몸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수·상·행·식(受·想·行·識)에서는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우주에서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나 생장염장(生長斂藏)으로 또렷이 현현(顯現)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와 타인·인간과 동물·동물과 식물·식물과 광물이 다르지 않다. 『금강경』의 사상(四相)의 진의는 거기에 있다.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따위가 반연(攀緣)되어 형성된 ‘수레’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수백, 수천가지 부품으로 완성된 자동차나 컴퓨터도 그 자체로는 치밀한 설계도로 짜 맞추어진 유기적 완성품에 불과하다. 수레도, 자동차도, 컴퓨터도 운전자와 전기적 작용이 합해져야 제3의 창조적 활동이 가능하다. 사대육신으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체는 천변만화의 갖가지 신구의업들을 쏟아내지만, 그 시스템 자체가 크게는 78개 기관의 가(假) 화합물에 불과하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나라고 할 실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근(六根)을 부리면서 몸속에서 실재하는 것, 그것이 생명이고 불성이다.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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