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융합은 어떻게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나②
선과 교학 힘겨루기, 또는 구별 짓기의 역학관계가 배경
삼교융합은 급변 시대에서 조선불교계가 모색한 자구책

『현정론』이나 『유석질의론』이 보여주는 삼교융합의 궁색함은 바로 조선전기의 불교계가 처한 딱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삼교융합에 내포된 문제의식은 선교융합을 확장 보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선교융합이 수행론의 범주에서 대두된 것이라면 삼교융합은 구원론의 범주까지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중기에 이르면 전기의 조악한 형태의 삼교융합이 불교계에 더욱 체화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청허당 휴정(淸虛堂 休靜, 1520~1604)의 『삼가귀감』이다. 그는, “세 가지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고집하여 함께 모이려 하지 않는 것을 내가 자주 보았다. 따라서 이제 간략하게나마 세 가지 문을 열어 이를 통하게 하려 한다”고 적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삼교융합의 밑바탕에는 유학적 구원론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학적 세상 구원론을 적극 수용하고 불교도 또한 그러하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더 진행되어 조선후기에 많이 보이는 유학자와 사문의 교류는 유학과 불교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한 근거가 아니라, 피안을 통한 구원보다는 역사를 통한 구원이라는 유학적 가치관과 세계관이 보편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심재룡은 지눌에 의해 확립된 선교융합적 불교관이 개화기 이전까지 맥맥히 이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첫째, 이태조가 홍천사를 창건했을 당시 그 주지 상총이 임금에게 모든 선종 사찰로 하여금 송광사, 수선사의 제도와 계율에 따라 법식을 행하기를 바란다고 상소하여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 …… 선에 대한 지눌 특유의 접근 방식, 즉 자교명종(藉敎明宗)으로 언설을 통한 분명한 지적 이해를 기본으로 불교에 입문케 한 다음 간화선을 통하여 지해병(知解病)을 제거한다는 요령이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에게 뚜렷이 나타난다. …… 셋째, 지눌의 뜻을 고스란히 받드는 서산대사를 들 수 있다. …… 넷째, 서산의 제자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역시 의리선(義理禪)과 격외선(格外禪)을 근기에 따른 구별이라 말하며 선, 교, 염불을 고루 채용한 점에서 보조선과 길을 같이하고 있다. …… 다섯째, 편양과 나란히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이 있는데,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제자이다. 부휴는 서산과 함께 부용 영관(芙蓉靈觀)의 2대 제자이다. 벽암의 제자들이 송광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 …… 여섯째, 위에 든 승려들이 지눌, 서산처럼 모두 선과 교에 정통했다는 사실을 들어야겠다. …… 일곱째,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간행, 유포된 고서 목록을 보자.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줄여서 ‘절요’라고 한다)는 조선을 통하여 가장 널리 퍼진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 삼교융합의 기조도 함께 감안하여 선교융합이 불교내부의 수행론적 측면에 치중한 것이라면, 성리학 이념을 받아들여 구원론적 측면을 보강한 경향으로 파악하고 싶다. 선교융합이라는 한국불교의 철학적 특징은 세속화된 고려 불교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기된 수행중심주의에서 출발했다. 이런 선교융합 기조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거치며 세상 속에서 세상을 구제한다는 유학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더욱 밀착되었고 삼교융합으로 전개되어 나갔다고 볼 수 있겠다.

Ⅲ. 구한말 불교계의 풍경: 김경운을 중심으로

고려조의 선교융합은 선과 교학이 힘겨루기 내지는 구별짓기의 역학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 선과 교학이 ‘차별화 과정’(sorting-out process)에 입각하여 불교적 정통성 내지는 우월성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 그 대안으로 모색된 제3의 길이 지눌의 선교융합이었다. 그리고 조선 개국 초의 선교융합은 성리학적 이념과 반불교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조선 왕조의 통치체제 속에서 겨우 형성되고 굳건해졌다.

그리고 조선후기와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유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선교융합과 삼교융합의 태도는 제국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일본을 포함한 주변 열강의 침탈에 맞서 조선불교계가 모색한 자구책이고 활로였다.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恐惟我愁生春去後, 庭前福植泰平花. 天心欲密新根托, 細雨終宵閏白沙. 石翁 번역 내가 봄 지난 뒤 근심이 생겨 뜰 앞에 태평화를 심었더니 햇살은 새 뿌리에 가만히 깃들고 가는 비는 새벽녘에 흰모래를 적시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恐惟我愁生春去後, 庭前福植泰平花. 天心欲密新根托, 細雨終宵閏白沙. 石翁 번역 내가 봄 지난 뒤 근심이 생겨 뜰 앞에 태평화를 심었더니 햇살은 새 뿌리에 가만히 깃들고 가는 비는 새벽녘에 흰모래를 적시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신문물과 개화사상에 올라탄 제국주의 이념은 전면적이고 강렬했기 때문에 조선 불교 내부의 이론이나 수행 전통의 차이를 구별하고 따질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에서 구한말로 이어지는 선교융합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불교가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사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해 볼만한 인물로 김경운 화상이 있다.

김경운의 생애 이력과 남긴 문건을 살펴보면 선, 화엄, 천태, 계율, 포교에 이르기까지 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남긴 필적과 그에 대한 각종 기록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그는 강백(講伯)이며 사경사(寫經師)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1880년 민비의 발원으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서사(書寫)하였고, 1896년부터는 선암사에서 『화엄경』사경을 시작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 이렇게 사경 업적을 많이 남겨 교학에 치중한 듯 보이지만 그가 남긴 문건을 보면 교학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 얼핏 드러나는 편지가 하나 있다.

이 둘이 아니며, 행포원융 상즉상입(行布圓融 相卽相入)의 십현법문(十玄法門)이 분명하게 손바닥에 있는 것 같다. 만약 혹시나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지묵(紙墨)의 사이에 머리를 묻고, 종일 화문불조(化門佛祖)의 과굴(窠窟)에서 저들의 보물을 세면서, 오랫동안 흙덩이를 쫓는 개처럼, 종이를 뚫는 벌처럼 될 것이니, 전날처럼 전일하게 칭송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후에 76년의 잘못을 깨닫고 날마다 엄자산(崦嵫山)으로 들어가고자 하니 언제 미칠 수 있겠느냐. 여기의 강원은 유명무실하여 학도가 20명도 안 된다. 모두가 초학이라 날마다 아침에 차를 마신 후에, 나와 함께 구독(句讀)의 사이에서 머리를 맞대니, 나와 같은 늙은이에게 허공꽃[空花]이 눈에 가득 차게 하고, 콩인지 보리인지 구별하지 못하면서 서로 다투니, 만약 눈 있는 사람이 본다면 마땅히 크게 웃을 것이다. 『능엄경』을 잡은 사람이 셋이고, 『원각경』은 둘, 『반야경』이 셋, 『기신론』이 하나, 『대교』(화엄경)가 하나, 『사집』이 다섯이다. 규봉(圭峰)이 문장의 뜻만을 찾는 것을 광혜(狂慧)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김경운이 화엄경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서울 개운사의 석전 박한영을 찾아가 있던 손상자 조종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는 편지에서 흙덩이를 쫓는 개처럼, 종이를 뚫는 벌처럼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계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문자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강원의 현실을 광혜라는 말로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불교관이 교학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건인 경호(鏡湖)가 쓴 「고승이야기: 선암경운(仙巖擎雲)」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는 김경운이 계율을 진작하고 도심포교당 설립에 앞장섰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동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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