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융합은 어떻게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나①
지눌의 선교융합적 불교관은 조선 초기 더욱 주목 받아
조선에서 불교를 지켜낼 명분 역시 지눌에게서 가져 와

Ⅰ.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되는 선교융합의 기조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한국불교의 특징 내지는 범형(範型)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되짚어 보기 위한 것이다. 한국인은 비빔밥을 좋아해서 종교도 비빔밥처럼 한다는 어느 외국인 불교학자의 농담끼

짙은 통찰이 있기도 했지만, 선교융합의 기조가 한국불교에서 범형내지는 전통으로 굳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이 연구는 선교융합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선(禪)이 등장한 이후부터 그리고 현대 한국불교에서 선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한국불교에서 융합적 특징은 고려시대부터 본격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 하면서 단어 외우듯이 외운 것 말고 선교융합이 어떤 역사적, 사상적 과정을 거쳐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구조적으로 분석한 사례는 드물다. 또 지금의 한국불교와 시기적으로 밀접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까지 포괄하여 논의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본 논문에서는 선교융합의 기조가 어떻게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먼저 그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 지눌과 정혜쌍수의 융합적 불교관이 계승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현대 한국불교와 직결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선교융합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던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구한말 선암사 경운원기(擎雲元奇,1852~1936) 화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융합 불교의 기조와 관련하여 새롭게 확인된 자료를 소개할 필요성 때문이고, 선교융합 기조가 현대 한국불교에 이어지기까지 근대시기 출가 사문의 역할과 비중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함이다.

Ⅱ. 禪敎 융합의 철학적 토대 형성과 그 전개

고려시대는 한국 선불교의 철학적 토대가 형성된 시기였는데 그 이론적 바탕이 바로 지눌의 선교융합이었다. 그의 「권수정혜결사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행적이 고려불교계의 문제점과 폐단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서 출발하였지만, 선교융합적 불교관은 그의 통찰과 체험의 결과였다. “지눌의 선불교 철학이 가지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가 선체험(禪體驗)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 화엄 철학을 융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지눌은 자신의 저작에서 중국의 『화엄경』 해석가들, 즉 종밀(宗密, 780~841), 징관(澄觀, 738~840) 특히 이통현(李通玄, 646~740)의 견해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눌의 선은 화엄을 철학적 기초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이 선교융합적 불교관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고려불교라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 불교 수행에 대한 그의 개인적 식견과 통찰이 결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통찰(선)과 그것의 언어적 설명(교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문제의식, 당시 화엄과 선수행자 양쪽 모두의 출가 사문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에 그의 진단, 본래성불과 연기론 그리고 돈(頓)과 점(漸)이라는 불설의 상충됨을 극복하는 과정 등이 모두 집약되고 응축된 결과물이 바로 선교융합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석문 續 紙嚢纔乏舊 年茶, 又煮江南橘 柚花, 一縷香烟 藏不得, 松風吹 落野人家. 八十五歲沙門 번역/종이 주머니에 조금 남은 지난해 묵은 차를 또 다시 강남의 유자꽃과 함께 달이니한 줄기 향 너무 좋아 감출 수 없고 솔바람은 불어와 시골집에 떨어지네. 85세 사문.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석문 續 紙嚢纔乏舊 年茶, 又煮江南橘 柚花, 一縷香烟 藏不得, 松風吹 落野人家. 八十五歲沙門 번역/종이 주머니에 조금 남은 지난해 묵은 차를 또 다시 강남의 유자꽃과 함께 달이니한 줄기 향 너무 좋아 감출 수 없고 솔바람은 불어와 시골집에 떨어지네. 85세 사문.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이런 지눌의 선교융합적 불교관은 조선 개국 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태조 7년의 기록을 보면, 조선 왕실은 사대부 성리학자들의 눈치 속에서도 흥천사(興天社)의 감주(監主)인 상총(尙聰)의 입을 빌어 최소한의 불교나마 지켜낼 명분으로 지눌의 선교융합적 태도를 그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오라, 그것이 임금을 장수하게 하며,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선종과 교종이 이익과 명예만을 탐내어 유명한 사찰을 다투어 차지하여 그 선을 닦고 교를 넓히는 곳은 겨우 한두 개만이 남아 있었으니, …… 원컨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선종과 교종 중에서 도덕과 재행(才行)이 영수가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서울과 지방의 유명한 사찰을 주관하게 하되, …… 그 서울과 지방의 유명한 사찰도 마땅히 송광사의 제도를 모방하여 모두 본사의 소속으로 삼아서 서로 규찰하게 한다면, 그 법을 만들어 복을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비록 점점 쇠퇴하고자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인데, ……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송광사의 조사(祖師)인 보조(普照)의 남긴 제도를 강(講)하여 이를 시행하고 기록하여 일정한 법으로 삼고…….

한국불교사를 염두에 둘 때, 조선 개국 초기라면 여말삼사(麗末三師)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도, 상총은 조선에서 불교를 지켜낼 명분을 멀리 송광사 지눌에게서 가져오고 있다. 그 이유로는 여말삼사에 해당되는 인물들이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동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또 이 내용을 통해 지눌과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지눌의 이력이 조선개국 초기의 성리학적 지식인들에게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선교융합적 불교관은 조선 개국 초에 그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반불교적 경향 속에서도 불교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중요한 명분으로 작동했다. 뿐만 아니라 승려의 교육과 사찰운영 체계에도 선교융합적 방식이 실제적인 기준으로 기능하여 이후의 조선불교가 나아갈 방향이 이 시점에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선교융합적 불교관은 조선전기에 나타난 삼교융합의 기조와 더불어 확장 강화 되었다. 삼교융합적 불교관은 불교이론 내부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반불교를 기조로 하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타협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삼교융합이론은 『현정론(顯正論)』이나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론적으로 궁색한 모양새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삼교융합이 대두되기까지 당시 불교계가 당면한 과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불교계는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너희들은 어떻게 세상을 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대사회적 역할과 그와 관련된 불교의 위상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송대(宋代) 성리학이 불교에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대개의 종교는 궁극적으로 피안을 염두에 두고 구원을 발설한다는 점에서 세상에 대해 무책임하다거나 도피적이라는 의심을 벗어던지기 어려운데, 유학자들은 그런 불교의 한계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구원론(soteriology)은 모든 종교에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구원이 끝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세상 밖에서 겨우 완성될 때,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를 구원하는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도리가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애당초 구원할 수 없는 것을 구원한다고 말하는 일종의 ‘립서비스’ 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가지고 볼 때, 피안을 전제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구하고 역사라는 시간의 축 위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유학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절실한 구원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반응 양상이 조선전기에 겨우 삼교융합의 불교관으로 나타났다.

-동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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