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수치스러울 땐
선암사 뒷간에 가자
선암사 뒷간에 가 쪼그리고 앉아서
판자 틈으로
먼 산 바라보자
먼 나무 바라보자
찬바람 맞아보자
판자 틈으로 새어든 햇살이
어떻게
내 살결로 스며드는지 느껴보자

삶이 서러울 땐
선암사 매화꽃 보러 가자
무우전(無憂殿) 담장길 매화나무
아래 앉아서
홍매 백매 사이로
희고 붉게 물든
새소리 들어보자
홍매 백매 사이로
새들이
희고 붉게 꽃잎 따먹는 소리
들어보자
희고 붉은 꽃잎이
어떻게
근심 없이 떨어지는지 바라보자

삶이 부끄러울 땐
삶이 서러울 땐
선암사 가자
선암사 가보자
선암사 가서
뒷간에도 쪼그려 앉아보고
매화나무 아래도 앉아보고
만세루 옆에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도
마셔보자
장군봉 높은 하늘 높은 구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보자

-언제부턴가 순천 선암사는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가지 않아도 따스하고, 가면 더욱 따스하다. 가지 않아도 편안하고, 가면 더욱 편안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작가 유홍준 교수는 그의 선암사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선암사는)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가면 마음이 마냥 편해지는 절집이다”고 적고 있다.

나는 유홍준 교수만큼의 안목과 눈썰미는 없다. 그래도 내가 여태까지 다녀본 산사 가운데 가장 아늑하고, 가장 절다운 산사가 선암사다. 선암사 가운데 나를 맨 먼저 이끈 곳은 ‘뒷간’〔대변소(大便所)〕이다. 처음에는 ‘깐뒤’로 잘못 읽었다. 분명 변소는 맞는데 글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져 있다 보니, ‘깐뒤’로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선암사 뒷간에 갈 때마다 그 ‘깐뒤’라는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단 몸을 ‘까야(옷을 벗어야)’ 일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순전히 나무와 판자로 된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저 아래 먼 허공으로 떨어지는 내 배설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곤 했다. 두 번째로 나를 이끄는 선암사 풍경은 무우전(無憂殿) 담장길에 있는 ‘늙

은 매화나무’〔노매(老梅)〕다. 늙어도 늙은 줄 모르고 고고하고 기품 있게 피워내고 품어내는 노매의 꽃과 향이다. 저매화꽃과 매화향 앞에서 그 누가 삶을 욕되다 할 것인가. 얼마 전에도 나는 내 마음의 관음(觀音)과 함께 선암사에 갔다. 가을이어서 매화꽃은 없었지만, 뒷간은 여전히 ‘깐뒤’로 나를 기쁘게 맞아 주었다. 나는 나의 관음과 함께 그 뒷간에서 옷을 까고 모든 근심을 풀고 왔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해주는 마음의 관음이 항상 고맙다.

-이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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