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삶’이란 진정 무엇인가? 홀연, 나이가 들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먹고 살기 위해, 이성을 만나기 위해, 아니면 재산을 모으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등등 모두 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고작 그것 때문에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우리네 삶이 아닌가.

예전, 이웃 종교인인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삶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삶은 계란”이라고 유머버전으로 웃음을 선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 삶의 여정은 그 같을 수도 있다. 아무튼 돌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삶의 질문에 그렇듯 가벼운 웃음으로 풀어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살고 살아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삶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들어 코로나19 때문에 먹고살기가 더욱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종교인도 속인도 모두 돈타령이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돈이 과연 우리네 생명줄만큼 소중할까. 사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 돈은 신앙과 같다. 하지만 중·상류층 사람들은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느 정도 문화를 향유하며 유유자적하게 살 법도 하다. 그런데도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 등 너도나도 더 많은 돈을 추구한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없다. 다만 돈만 많으면 행복할 거라는 관념적 사고에만 머물러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김밥장사를 해 어렵게 돈을 모은 사람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어려운 곳에 써달라며 보시행을 하는 것을 보곤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도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아직도 돈 앞에 자유롭지 못하고 비굴해질 때가 더 많다. 허나, 누가 누굴 탓하랴.

돈이 만사형통인 사회, 종교는 물론 정치, 교육, 문화, 스포츠까지도 돈 따라 움직이는 물질 중심적 사회가 문제다. 하지만, 그런 돈은 삶의 품격은 물론 진정한 행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누군가는 ‘돈은 지구상에 머무는 동안 주차비’라 했다. 요즘 세태를 보면, 돈 돈 하다가 정말 머리가 돌아버릴까 봐 걱정이다. 가끔 TV를 보면 인문학과 행복론 강의가 자주 눈에 띈다. 삶의 의미나 행·불행에 대해 수많은 얘기들이 오고 간다. 그만큼 행복의 모습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어떤 이는 물질을 중시하고 또 어떤 이는 정신적 가치나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대개는 인문학의 가치를 정신적 문화적 삶의 지향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데 그치지 말고 삶을 살아가라는 통찰이다. 스티브 메킨 주연의 영화 ‘빠삐용’은 실존인물이다. 살인죄 누명을 쓴 뒤 종신형을 선고 받고 악명 높은 기아니 감옥에 수감된 그는 무려 8번이나 탈옥을 감행하면서 누명을 벗으려 애쓴다. 그러다가 재수감된 감옥, 극한의 상황 속에서 비몽사몽의 환각에 빠진다.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막막한 인생길을 가는 그에게 판결이 내려진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너를 기소한다.”

재판장의 준엄한 판결에 따라 감옥으로 들어가는 빠삐용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 ‘인생을 낭비한 죄’란 ‘빠삐용의 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진정 되돌아보게 한다. 여기서 ‘낭비’란 자신의 삶을 의미 없이 흘려 보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단죄하는 상징적 메시지가 아닐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바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삶을 보람되게 회향하는 일일 것이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은 해보고 싶은 일을 못해본 것이라고 한다. 문득,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 한 구절이 생각난다.

“홀연히 백년이 되거늘 어찌 배우지 않느냐/ 일생이 얼마나 된다고 헛되이 날을 보내느냐.”

-제주특별자치도노인복지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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