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운원기의 포교활동⑤․끝.

강석 잇고 교연 주관하며 해박한 가르침으로 일세 풍미
참회계엔 선사 법문 들으려는 대중 구름처럼 모여들어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선암사를 비롯하여 한국불교 대중들로부터 존경받던 경운은 78세가 되던 1929년 1월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가 한국불교를 통일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려고 개최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교정으로 선출되었다.

이 대회는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가 당시 30본산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친일적인 경향이 강했으므로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향한 불교청년들로서는 교무원을 대표로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제의 통제를 벗어나 천 개에 이르는 한국사찰을 통일시킬 기관의 필요가 날로 간절해졌다. 청년회를 이끌던 백성욱, 김법린, 도진호 등은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1929년 1월 통일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청년회는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사전에 많은 회의를 통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첫 번째 발기회 준비는 1928년 11월 11일 각황사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서 한국불교 중앙기관의 조직 및 교헌의 제정을 위하여 조선불교승려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11명의 발기회 준비위원을 선발하였다. 위원들은 11월 11일, 11월 14일, 그리고 11월 25일 세 차례의 발기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승려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하였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1928년 11월 30일과 12월 1일 두 번의 승려대회 발기대회를 통해 대회의 개최시기와 목적에 대해 정리하였다. 대회의 목적은 당시 백성욱이 발표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한국불교가 지금까지 일정한 내규가 없어 통일적 발전을 도모하지 못했으며, 승려들도 사명과 지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헌의 제정, 중앙교무원 헌장 및 승니법규의 제정 등을 통해 한국불교를 통일하고, 대외적으로 불타의 진리를 선양하고자 하였다. 이런 문제 외에도 교육, 포교, 강기(剛紀) 등의 현안을 해결하려 하였다.

두 번째 발기회에서는 11명의 전형위원을 구두로 호선하고 그 전형위원들이 준비위원 31명을 선정하고 승려대회는 1929년 1월 3일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普覆 天下, 번역: 천하를 두루 뒤덮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화첩(금둔사 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普覆 天下, 번역: 천하를 두루 뒤덮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12월 1일 오후 4시 태서관에 모인 준비위원들은 권상노를 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서무부와 제헌부 외교부 그리고 지방선전부로 나눠 업무를 분장하였다. 또한 위원장 명의로 각 본산 사찰에 대회 개최의 사정을 통지하고 승려대회 참가요령을 전하였다. 마침내 1929년 1월 3일에서 5일까지 각황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다. 1929년 1월 3일에서 5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의 전황은 다음과 같다.

3일 오전 10시 각황사에서 개최된 첫날은 107명이 참석하여 사회와 서기 사찰 그리고 원활한 대회진행을 위해 의안 심의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이날 백성욱은 승려대회 개최의 취지를 종헌과 기타 불교계의 법규를 제정하여 불교계의 통일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둘째 날은 종헌과 함께 중앙교무원칙과 교정회법 그리고 법규위원회법 등이 통과되었다. 종헌과 기타 불교계의 법규를 제정하여 불교계의 통일을 통해 발전을 기하고, 특히 불교계의 모든 활동과 조직의 헌장이 될 수 있는 종헌을 제정한 것은 실로 그 의미가 크다.

셋째 날은 종회법과 기타 안건에 대한 근본책을 토의하였다. 그리고 종헌에 의해 설립된 각종 직원을 선거하기 위해 11명의 전형위원을 선발하였으며, 이들은 한국불교의 상징적 존재로 김환응, 서해담, 방한암, 김경운, 박한영, 이용허, 그리고 김동선 등 7인을 교정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중앙교무원칙에 의해 서무부, 교학부, 재정부 3부의 부장을 선출하였고, 마지막으로 대회에 소요된 경비의 처리와 준비위원회의 회계를 심사한 다음 하오 7시에 폐회하였다.

이처럼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는 일제의 통제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도에서 개최되었으며, 대회 결과 종헌, 종회, 교무원 등을 성립시켜 한국불교 청년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다. 이때 경운 선사가 다른 6인과 함께 교정에 선출된 것은 일제하 한국불교의 정체성 운동에서 대표로 선임된 것을 의미한다. 일찍이 임제종 관장에 선임되어 불교계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확인되었지만, 교정의 선임은 그 위상을 넘어 일제의 한국불교 통제에 항거하는 자주적 활동 속에서 대표가 된 것이므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따라서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한국불교의 대표로서 그 위상을 견지한 선사의 활동은 높게 평가 되어야 한다.

Ⅳ. 결 어

근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사는 세수 85세가 되던 1936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선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생애 전반이 격변기와 일치하는 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올곧은 수행으로 일관한 구도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 선사의 생애와 활동은 내외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선암사를 중심으로 한 내적 활동은 대승암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과, 계단을 복원하여 수행적 기틀을 마련한 것, 환선정을 매입하여 백련결사를 통해 대중을 포교한 것, 그리고 참회계 설립하여 대중들의 수행을 이끌었던 것들을 들 수 있다.

환경 노사를 따라 선암사로 옮긴 경운은 대승암 강주였던 경붕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1881년 그 뒤를 이어 대승암 강주가 되었다. 강석을 물려받고 교연을 주관한 그는 해박한 가르침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결과 문하에서 제산의 방장과 좌주가 된 자가 10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선사는 정미년(1907) 예로부터 선암사에 있었던 계단을 회복시켜 선암사 학인을 중심으로 계단을 다시 수립하여 계율을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선사를 찾아온 수행자들은 철저한 지계정신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와 같은 행위를 지켜나갔기 때문에 그의 문하생들은 모두 본래부터 의해가 그대로 계행에 부합된 스승으로 여겼다.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대표 52인은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종무원을 설립할 때 서무부장으로 참여하였다. 원종이 전국의 사찰을 정비하고 교육에 힘쓸 때 선사 역시 이곳에 몸담아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조동종과 연합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임제종의 관장이 되어 민족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사의 대외적 활동은 종단활동과, 각황사 포교활동, 그리고 교정 선출로 정리할 수 있다. 1913년 지역 사회의 포교와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선사는 송광사와 선암사가 힘을 합쳐 순천에 있는 환선정을 사들여 포교당을 세웠다. 이곳에서 뜻을 함께 하는 출가 및 재가불자들과 더불어 백련결사를 시작하여 서방 정토로의 왕생을 서원하였다. 동참자들은 여산 혜원이 설립한 백련결사보다 신앙적으로 뛰어난 자부심을 갖고 결사에 참여하였다.

선사는 1915년 무렵부터 7년 동안 서울 각황사에 주석하면서 포교사로 활약하였다. 생불처럼 여긴 명성에 걸맞게 선사는 각황사에서 설법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각황사 활동 이후 선암사에 주석하게 된 선사는 대중들이 지계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참회계를 조직하였다. 그것은 불도를 가까이 하는 자는 지계하고 수행하는 그것이 그대로 자리하고 이타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실천이었다. 참회계에는 선사의 법문을 들으려는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참회를 하고 계첩을 받으려는 자가 무릇 만 명에 이르렀다.

1929년 1월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가 한국불교를 통일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려고 개최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교정으로 선출되었다. 이 대회는 조선불교청년회가 주관하여 일제의 통제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도에서 개최되었으며, 대회 결과 종헌, 종회, 교무원 등을 성립시켜 한국불교 청년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므로 교정의 선임은 일제의 한국불교 통제에 항거하는 자주적 활동의 위상을 상징한다.

이런 경운 원기에 대해 당시 세인들은 강학에 투신 만행하신 것과 ‘사경불교’의 거장이었던 것은 물론 포교방면에 있어서도 제세의 도를 걸으신 성자로 추앙하였다. 선사의 열반을 들은 중앙불교 전문학교 교수 박윤진은 선사를 ‘승성(僧聖)’이라 표현하며 당시 청년 불자들이 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한국불교가 의지했던 지도자가 홀연히 왕생한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한국불교에 있어 너무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은 선암사만의 불행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악운으로 평하였다.

-진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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