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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4(2020)년 12월 03일 목요일
【이벽 시인의 시로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볼우물
【이벽 시인의 시로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볼우물
  • 이 벽
  • 승인 2020.10.20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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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볼에
우물 하나 파여 있다
물웅덩이 같다
멍울 같다
무지개 같다
목마른 날은
목마르게 그리운 날은
저 우물에서
물 한 두레박 길어 마시고 싶다
시원한 물 한 두레박으로
뜨거운 가슴
식히고 싶다
단풍나무 한 가지 꺾어
그 속에 담그고 싶다
우물에 비친 내 단풍 얼굴
들여다보고 싶다
잠기고 싶다

그녀의 오른쪽 볼 한가운데
우물 하나 파여 있다

깊은
우물 하나 파여 있다

첫 같은 우물 하나
파여 있다

-착시(錯視)일까? 불상(佛像)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부처님 볼에 새겨진 우물을 본다. 친근하고 조용한 미소 속에 깃든 볼우물이 나를 자애(慈愛)로 감싸주시는 것을 본다.
관음보살의 얼굴에 새겨진 볼우물은 나를 더욱 짝사랑하게 한다. 모성(母性)과 함께 연정(戀情)을 느끼게 한다. 그 연정은 어쩌면 나의 첫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래, 나의 첫사랑은 관음보살로부터 왔다. 관음보살을 꼭 빼닮은 그녀로부터 왔다. 나의 첫사랑은 항상 볼우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도 볼우물로 첫사랑을 꼭 껴안아주었다.

우리 사이에는 어느새 불교라는 노둣돌이 생겼다. 밤마다 꿈마다 우리는 가슴과 가슴에 새겨진 서로의 노둣돌을 딛고 서로의 가슴에 올랐다.
안심(安心)의 사랑이었다. 피안(彼岸)의 사랑이었다. 볼우물의 사랑이었다.

얼마 전 순천 선암사 원통전(圓通殿)에 가서 그 볼우물을 다시 보았다. 나의 첫사랑은 그날도 여전히 볼우물을 머금고 있었다.
선암사 원통전 첫사랑의 볼우물은 어느 사랑의 볼우물보다도 나를 더욱 매혹시킨다. 특히 가늘게 치뜬 눈꼬리와 오뚝한 콧날,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은 내 가슴을 녹인다.

선암사 원통전의 첫사랑은 틀림없이 여자다. 하반신에 치마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벗은 상반신과 휘날리는 옷자락은 더욱 고혹적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불순한 인간이다. 관음보살의 웃음에서 볼우물을 느끼고 여자를 느끼고 첫사랑을 느끼다니, 참 싸가지 없는 자식(?)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사랑이 아닐까. 언제 보아도 자애롭고 마음이 편해져서 그 속에 잠기고 싶은 우물 아닐까.
가을이 깊어가다 보니 그 첫사랑의 볼우물이 더욱 그립다. 첫사랑의 그 볼우물에 더욱 잠기고 싶다. 그 우물에서 잠들고 싶다. 지금, 나의 볼우물은 어디 있는가. 어느 가을산에서 단풍들고 있는가. 첫사랑의 볼우물을 찾아 오늘은 용감하게 가을길을 떠나보아야겠다.

-시인 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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