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잘 쓰고
사회적 거리 잘 지키고
방역 수칙 잘 따르는 것이 수행
이 세상 모든 것이
緣起 아닌 것 없어
코로나19도
緣起로 일어난 것

 

세상에 조건 없이 생겨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코로나19도 그렇고 전쟁도 그렇고 태풍도 그렇고 홍수도 그렇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문화도 생노병사(生老病死)도 그렇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正覺) 후에 불교의 가장 근본 바탕으로 연기(緣起)와 중도(中道=팔정도)를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연기는 불교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연기가 없으면 불교는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부처님의 성도(成道) 직후, 1,250인의 제자들도 바로 이 연기 법문을 듣고 바로 아라한이 되었다. 우리 역시, 이 연기만 제대로 꿰뚫는다면 곧바로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연기의 이치는 매우 간단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게 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잡아함경』 제30권 335경 「제일의공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단순한 진리가 불교의 핵심사상 중 핵심사상이다. 불교의 모든 경전은 바로 이 단순한 진리를 설명하고 실증하기 위한 수단(방법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를 한 번 살펴보자. 코로나19가 왜 생겨났는가? 저절로 생겨났는가? 절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人爲)다. 인재(人災)다. 코로나19가 세계를 집어삼키기 전까지, 자연은, 우주는, 지구는 이미 그것을 예고해왔다.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신종 플루(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생긴 새로운 바이러스), 메르스(MERS, 중동 호흡기 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중증 급성 호흡기 질환) 등 코로나류의 바이러스는 코로나19라는 인류 최악의 변종 바이러스를 이미 예고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번졌는가. 그리고 어떻게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

는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만 살펴보자. 처음엔 중국 우한에서 들어왔다. 그리고 한두 명의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신천지’라는 집단을 통해 폭발적으로 번졌다. 왜 그랬는가. 방역당국의 그렇게도 처절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소한의 방역수칙인)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다닥다닥 모여 앉아 노래하고 통성기도하고 떠들며 밥을 함께 먹었다. 그런 (사소한, 아주 사소한) 조건(연기)들만 잘 지켰어도신천지에서 코로나19가 그렇게 참혹하게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까스로 다잡아가곤 있지만, 최근의 폭발적인 재확산 역시 마찬가지다. 방역당국의 절망적

인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사랑제일교회의 막가파식 집단대면예배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대규모 불법집회를 강행하고 거짓말로 당국의 진단을 피하고 다니다가 이 같은 사단이 벌어졌다.

물론, 정부당국도 그런 조건을 만드는데 한몫했다. 확진자 수가 한 자리대로 떨어지자 긴장의 끈을 너무 낮췄다. 만약 그런 조건들만 없었다면(방역당국이 그토록 간절히 호소한 최소한의) 조건만 잘 지켰다면 사태가 이 정도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결코, 남 탓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 자신도 한번 되돌아보자. (방역당국의) 그런 조건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켰는가. 연기와 배려를 얼마나 생각했는가.

연기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 체계다. ‘있다, 없다’라는 공간적 구조 체계와 생(生)과 멸(滅)이

라는 시간적 구조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 이 세상 이 우주 모든 만물은 인(因)과 연(緣)과 과(果)을 맺고 산다. 그 시·공속에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은 존재하고 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고 살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지금 코로나19를 괴로워하고 두려워할 뿐이다. 코로나19도 우리가 만든 조건(원인)에 따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과(果)였음을 직시하고 그 과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 백신 개발하기 등 또 다른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삶이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다. 수행, 별 것 아니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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