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여름 대둔산 계곡에서 노닐고 있었다. 계곡인근에 민물고기 횟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산천어 양식장이 있었다. 얼추 수십 마리가 넘는 산천어들이 양식장 안에서 일정한 대열을 형성하면서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는 것을 쪼그려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횟집에 손님이 왔는지 주인이 뜰채를 들고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산천어들의 대열이 흩어지면서 우왕좌왕 숨길 데 없는 곳에서 서로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산천어들과의 거리는 내가 훨씬 가까웠다.

고려 시대 문신인 이규보가 바닷가에서 낚시하고 있었는데 갈매기 떼들이 시끄럽게 해 낚시를 할 수 없게 되자 이튿날 활과 화살을 들고나갔다. 그러자 ‘기미’를 알아차린 갈매기 떼들이 자취없이 사라져 버렸다. 장자와 열자가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놀다가 장자가,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군” 하고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열자가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조롱하듯 반문하므로, 장자는 “물고기 되어보지 않아도 물고기의 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답변한다.

불멸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은 그가 청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작곡한 곡이었다고 한다. 수술로 팔이 없어진 환자가 팔의 고통을 호소한다. 환지통이라고 한다고 한다. 아내나 자식이 출산할 때 구체적 통증을 느끼는 남편이나 부모도 있다. 이역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쌍둥이 형제의 죽음을 감지한 사례도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동학 탄압 시기에 도피 생활을 하다가 어느 해변에서 해풍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부러지는 것처럼 아프다”라는 동체대비의 상징적 독백을 남긴다. 절집에서 ‘아랫집 송아지가 아픈데, 윗집 송아지가 운다’는 화두는 흔하게 회자 되는 선문답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꽃을 따서 대중들에게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를 짓는다(拈花示衆).

대화란 언어와 언어의 교환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지, 실제로 마음 자체를 읽는 것은 아니다. 염화미소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수행은 마음의 서버와 곧바로 접속하려는 치열한 노력이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마음의 서버에 연결되어 있다. 그 서버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단 한시도 존속할 수가 없다. 그대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 생생한 증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이다. 물속에서 물고기가 목말라하고 누군가는 오늘도 이 숲 저 숲을 배회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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