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운 원기의 포교활동④

78세때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서 교정으로 선출돼
참회계 계사로서 현세 나한이며 육신보살로 존중받아

환선정에서 시작한 경운원기의 백련결사에는 많은 불자들이 동참하여 감응을 받았다. 당시 결사에 참여한 여규형은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감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삼보를 숭신하였지만 삶은 유교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히 계율을 지키기 어려웠지만 경운선사는 이런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 계행을 닦게 하였다. 그런 모습에 감동되어 거사는 자신의 마음도 갖가지 반연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의 도제가 되고자 백련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나중에는 결사에 이름을 올린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겼고, 그 감응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간략하게나마 이렇게 발문을 써서 발원문 말미에 붙인다고 하였다.

이런 감응의 말처럼 경운 선사가 환선정에서 법문을 연창했을 때는 백련꽃이 피어날 정도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자재하였다. 그런 일이 나타난 것은 모두 선사의 훌륭한 행실과 뛰어난 업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죽간과 포백처럼 서적으로 유포된 실적의 결과로 평가되었다.

2. 각황사 포교와 교정 선출

1) 각황사에서 포교활동

선사는 64세가 되던 1915년 무렵부터 7년 동안 서울 각황사에 주석하면서 포교사로 활약하였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30여 년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아 학식과 도예가 대단히 고명하며 신이함이 많아 생불(生佛)처럼 여겼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선사는 몇 년간 각황사에서 설법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다.

경운선사가 활동한 각황사는 도성 안에 세워진 한국불교의 상징적 존재였다. 근대식 불교교육을 위해 불교사범학교를 추진한 원종은 한국불교의 포교를 위해 노력한 것이 도성 안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의 건립이었다. 1910년 10월 27일 전 한국의 승려들이 모금하여 북부 박동(磚洞)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였고, 10월 28일 동대문 밖 원흥사에 봉안하였던 금불(金佛)을 각황사로 이안(移安)하여 성대하게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각황사는 시대적 의미가 컸다. 1902년 동대문 밖에 세워진 원흥사 역시 격변기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그렇지만 불교계의 근대적 인식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한국불교를 관리하려는 생각에서 세워진 사찰이었기 때문에 관제적 성격이 짙었다. 반면에 각황사는 불교계의 힘으로 도성 내에 포교의 중심지를 세우고 싶은 염원으로 설립된 것이므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도심에 세워진 각황사의 활동 역시 예전과 달리 사회적인 실천이 많았다. 창건 다음날부터 일반인에게 불교를 전포할 계획으로 포교문을 다수 발행하기 시작한 것과, 불교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불교 강연과 서적발간 등이 이어졌다. 강연은 주로 구미에 가서 연구한 연구자들이 초청되었다. 그리고 각황사가 사찰이었던 관계로 대중적 강연도 종교적인 문제가 주로 행해진 것이 특징이다.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다섯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卽捻爲慊焉. 百年內 未滿百年, 母之壽何其短也. 번역 만 세 위에 다시 만 세를 더해도 아들에게는 흡족하지 못하고 백년 안에 백년도 못 채우는데 어머니 수명은 어찌 이리 짧을까.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다섯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석문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卽捻爲慊焉. 百年內 未滿百年, 母之壽何其短也. 번역 만 세 위에 다시 만 세를 더해도 아들에게는 흡족하지 못하고 백년 안에 백년도 못 채우는데 어머니 수명은 어찌 이리 짧을까.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서적 발간을 보면 각황사에서는 각지의 승사(僧史), 사적(寺跡)을 조사하여 발간할 계획으로 서해담(徐海曇), 이회명(李晦明), 김현암(金玄菴) 세 명을 편찬위원으로 선정하는 등 불교 유적의 보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외에 중앙포교당과 각 사찰과의 연락관계를 위해 불교월보를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면서 각황사는 점점 협소하게 느껴졌다. 1914년 9월 11일 창건 당시의 각황사를 모두 철거하고 9월 28일 일본과 서양을 혼합한 2층 교당을 기공하였다.

새로 건립된 각황사는 일반 신도를 위한 수계식을 거행하는 등 처음부터 적극적인 포교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당시의 유명한 선승을 초청하여 불교에 대한 대중적 강연을 개최하였다. 경운 선사가 각황사에 초청되어 설법한 것은 이 무렵이다. 선사는 그 후 7년간 각황사에서 여래의 정법을 선포하고 찬양하였다.

선암사에 있던 선사를 초청한 것은 각황사에서 설립된 불교진흥회였다. 진흥회는 선사에 대해 학식과 도예가 고명하여 신이함이 많으며, 삼십여 년 동안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아 생불과 같이 존경하는 것을 알고 서울로 초청하여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려주려고 계획한 것이다.

선사가 선암사에서 각황사로 설법하러 올 때면 환영회를 조직하여 승려들 가운데 일부는 수원역까지 출영하고, 일반 회원은 남대문 역에 나가 선사를 마중하였다. 도착하면 환영위원들이 함께 마차를 타고 각황사에 도착하도록 계획하였다.

1915년 4월 18일에는 경운대사는 실업가 칠십여 인이 입회하여 이들에게 무상의 진리를 설하였는데 신문은 종교계에 이와 같은 성황은 드문 일로 보도하였다. 각황사에서 대사의 설교는 다양하게 행해졌다. 1915년 5월 21일 오후 8시부터 석가세존 제2942회 관불회 때에 설법하였으며, 1917년 5월 석가여래의 제2944회 성탄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기념예식에서 설법하였다.

1916년 9월 경성에 있는 불교 각 포교당의 주최로 4일부터 동 10일까지 7일간 매일 오후 2시에 설교연합 추기대강연회를 열렸을 때 일곱 명의 설교자가 설법할 때 선사 역시 초청되어 설법하였다.

각황사 이외에도 선사가 설법한 곳은 인사동에 있는 조선선종중앙포교당이었다. 이곳에서 1916년 성도일 기념 연합강연회에서 박한영과 함께 설법하였다.

2) 교정 선출과 그 의미

각황사에서 7년간 활동한 선사는 선암사로 돌아온 이후 입적할 때까지 다시는 서울에 출입하지 않았다. 출가 이후 올곧게 이어온 지계의 자세를 지키는데 열중하였다. 실제 선사는 수계를 받고 61년 동안이나 조심하고 주의하여 지계가 청정하고 행동거지가 여법하여 수계를 받은 당시의 위의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암사에 주석하게 된 선사는 지계의 정신을 지키고 대중들로 하여금 그런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참회계를 조직하였다. 그것은 불도를 가까이 하는 자는 지계하고 수행하는 그것이 그대로 자리(自利)하고 이타(利他)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실천이었다.

중생이 미혹에 빠지면 본래의 영명함을 상실해버리고 점차 죄악이 증장하며 늘 악도에 떨어진다. 때문에 갖가지 불교경전으로써 부지런히 말씀을 일러주어 모두가 경전을 독송토록 하고, 사람들에게 경전을 연설해주어 널리 그들을 구제해주는 지남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말법시대의 경우는 더욱 더 지계에 정진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런 참회계를 통해 자상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세하게 일러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써 미혹을 열어주고 복락을 갖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불법을 강의하는 수행자의 성정을 살펴보고 그 언행을 점검해보면 남들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이 드문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참회계의 계사인 경운 선사는 현세의 나한이고 육신보살로 존중받았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평이 아니라 한국불교계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런 까닭에 경운 선사의 석장이 이르는 곳마다 법문을 들으려는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수계를 받고 명단에 기록으로 남기는 자가 무릇 만 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이제 참회를 하고 계첩을 받으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진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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