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운 원기의 포교활동③

원종과 별도로 임제종 설립 경운 스님을 관장에 선임
연로한 탓 실질적 활동 못하자 만해 스님이 임시관장

이 연합문의 내용을 보면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 예속되는 불평등 조약임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조약의 내용이 원종종무원 서기에 의해 누설되면서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실을 안 승려들은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팔아넘기는 매종역조(賣宗易祖)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특히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범어사의 오성월(吳惺月)과 한용운(韓龍雲) 등은 전라, 경상남도의 사찰을 단합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11년 1월 15일에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을 모아 송광사에서 회합하여 원종과 별도로 임제종을 세웠다. 그것은 서산휴정(西山 休靜) 이후 상승되어 오던 승가의 법맥이 태고보우(太古 普愚)의 임제종 계통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원종보다는 임제종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립된 임제종은 선암사의 김경운을 관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연로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자 한용운이 임시관장이 되어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연합사건을 저지하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임제종은 광주에 포교당을 설치하는 등 실질적인 활동에 들어갔으며 범어사로 종무원이 옮겨진 이후에는 동래, 초량, 대구, 경성 등 네 곳에 포교당을 세워 원종과는 다른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임제종의 움직임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연합사건을 저지하려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항일성향이 강했던 범어사의 오성월은 범어사의 본말사법을 제정하면서 총독부가 정한 선교양종을 쓰지 않고 임제종을 종지로 해서 신청하였다. 당시 묘향산 보현사의 승려들도 그 본말사법을 임제종에 부속하여 신청하였다.

그러나 양 종단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는 한국불교를 단독적으로 성립시켜 통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도는 1911년 6월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종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총독부에서 원종이나 임제종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통칭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행을 보다 확고하게 해두기 위하여 1912년 6월 26일자로 총독부의 내무부장관이 각 도의 장관과 함께 임제종의 활동이 빈번한 경남도장관 앞으로 공문을 통첩하였다. 이 통첩에 의하면 사찰의 종지 칭호를 망설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선교양종만을 쓰도록 하였다.

경성부는 1912년 6월 21일 원종종무원의 이회광, 강대련과 임제종종무원의 한용운 등 세 명을 소환하여 원종종무원과 임제종종무원의 문패철거를 명하였다. 이러한 행정적 조치에 원종종무원은 각본산주지회의를 열고 이미 3일 전에 철거하여 조선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렸고, 임제종종무원은 그 명령에 의하여 철거하여 우리 스스로 설립한 종단이 사라지게 되었다.

Ⅲ. 결사와 포교활동

1. 환선정(喚仙亭) 결사운동

1912년 일제의 사찰령으로 인해 원종과 임제종이 해체되자 선사는 지역 사회의 포교와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갖고 1913년 62세가 되던 해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선암사와 송광사가 힘을 합쳐 순천에 있는 환선정(喚仙亭)을 사들여 포교당을 세웠다. 이곳은 순천읍 동쪽에 있던 정자로 예로부터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꼽혔다. 정자의 왼쪽으로는 한줄기 맑은 물이 널리 휘감아 넘실대고 있어서 늘 선남선녀들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작은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이곳을 매입해서 결사를 주도한 경운은 모임의 이름을 백련사(白蓮社)라 하였다. 결사를 백련결사라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 때문이다.

1913년 대사가 포교당을 개설하려고 그 해 여름 읍성 동쪽에 있는 환선정에서 처음 모임을 가졌는데 연못에서 홀연히 흰 연꽃 수십 송이가 물속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하늘의 꽃처럼 난만하게 피어나서 청아한 향기를 사방에 내뿜었다. 그 꽃을 본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신심을 일으켰다. 경운화상도 연꽃을 감상하면서 일찍이 없었던 현상이라고 찬탄을 하였다.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부처님의 인연이 있는 곳임을 깊이 알아차렸다. 마침내 군청에 청원하여 그 정자를 보수하고 뜻을 함께 하는 출가 및 재가불자들과 더불어 백련결사를 시작하였다. 결사에 동참한 사람들은 환선정 결사를 중국 여산의 백련결사와 같이 생각하였다. 운옹 이병휘 거사, 소재 오재영, 남파 김효찬 등이 결사에 참여하고 글을 지어 그것을 기록하였으며, 경운 선사 자신도 환성정에서 백련사를 설립하고 결사를 도모한 것은 여산 혜원이 신심이 돈독한 123명을 모아 그 가운데 18명의 현인들이 대표가 된 백련결사에서 그 사상적 연원을 찾았음을 밝히고 있다. 백련결사가 서방극락세계의 왕생을 염원했듯이 환선정 결사 역시 서방 정토로의 왕생을 서원하였다. 일찍부터 경운 선사를 따랐던 송광사의 보정 스님 역시 환선정 결사의 사상적 연원이 여산 혜원의 백련결사에 있음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였다.

여산의 백련결사 꽃이 지금에 다시 피어났네
백련꽃이 피어난 곳은 구품 연화대와 같으니
극락의 유심정토세계가 곧 여기인 줄 알겠네
동림사의 성스런 염불 종풍 승평군에 닿았네.
보정, 「白蓮社」 『茶松詩稿』 권3.

이곳에서 경운 선사와 함께 결사를 도모한 사람들은 백련결사의 사상적 연원을 혜원의 동림사 결사에 두었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환선정 백련사가 혜원의 결사보다 우수하다고 자부하였다.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네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月來不見影 風動未聞聲. 달이 비쳐도 그림자를 보지 않고 바람이 움직여도 소리를 듣지 않는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네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月來不見影 風動未聞聲. 달이 비쳐도 그림자를 보지 않고 바람이 움직여도 소리를 듣지 않는다. 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혜원의 결사를 보면 사영운이 여산에서 혜원스님을 한번 친견하고는 정토경전을 번역하고 연못을 파서 백련을 심었다. 그리고 혜원을 비롯한 120여 명과 더불어 정토의 왕생업을 닦음으로써 백련결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곳 환선정은 예로부터 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흰 연꽃 수십 송이가 연못에서 홀연히 피어올랐으니 동일한 백련결사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공을 들여서 만든 것과 하늘이 만들어 준 것은 다르다. 그리고 물에서 솟아난 기이한 연꽃을 보고서 환희하고 찬탄하는 모습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이처럼 신령스럽게도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조짐이 어찌 사람이 손으로 심은 연꽃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1913년 여름 환선정 백련결사는 불상을 조성하였고, 10월 2일부터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하였다. 불상을 봉안하는 취지를 보면 법신에는 형상이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형상을 드러내고, 진리에는 언설이 없지만 방편을 인하여 언설을 베풀어 두었다. 언설은 반드시 진리에 의지하여 펼쳐져야만 모든 언설이 진여의 일미가 되고, 형상은 이에 법을 인하여 드러나야만 모든 형상이 법성과 동체가 된다. 동체이므로 형상이 무형상에 즉하고, 일미이므로 언설 또한 무언설에 즉한다. 이것은 무릇 색상의 형상과 소리의 언설을 통해서 진정한 불상을 보려고 한다면 궁겁토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 불상을 봉안하는 것도 또한 형상이 없는 것에 즉하여 형상을 드러낸 것이고, 내지 언설이 없는 것에 즉하여 언설을 낸 것이다. 때문에 이 불상도 또한 형상은 32상의 뛰어난 상호를 구족하였고, 그 언설도 또한 49년 동안의 파도처럼 방대하고 끝없는 것이다. 이에 그 진상(眞相)을 본다면 반드시 천안의 신통력을 터득할 것이고, 그 지언(至言)을 듣는다면 반드시 천이의 총지력을 터득할 것이다. 삼가 바라건대 선남자와 선여인은 경전에서 말한 대로 색상(色相)을 떠나서 진불을 친견하고 성언(聲言)을 벗어나서 지언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어리석음을 변화시켜 지혜를 성취하는 데에는 반드시 성언에 의지해야 진실을 증득할 수가 있고, 범부를 바꾸어 성인이 되는 데에는 반드시 형상을 보는데 장애가 남아있어서는 법을 증득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노란 꽃과 푸른 대나무 등이 모두 법신의 진상 아님이 없고, 꾀꼬리 울음소리와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 등이 모두 지극한 도리이고 오묘한 말씀 아님이 없다.

-진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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