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집착 없는 보시

『금강경』은 우리 불교인들만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21세기 얼마 안 가 전세계인의 스터디셀러가 될 것 같다. 사경도 하고 독송도 하고 암송도 하고 관상도 해보고 한번 『금강경』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매일 108배를 하면서 『금강경』을 몇 독씩 하고 지갑 속에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외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금강경』에는 들어가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다는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출구 없는 『금강경』에 대한 강의(번역 해설 포함)에서도 늘 출구로 나갈 생각, 즉 출구에도 머무른 바가 있으면 안 되며 바로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체(실체나 본체)가 있지만 우리에게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나 모든 것은 상(허상)일 따름이다. 부득이 그렇다고 치고 살아가면서 적응하고 좀 벗어나서 더 넓은 이상을 향하며 용(체상용의 용)을 써 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묘하게 움직이지 않는 한 그냥 세상은, 나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그러하기에[상] 그런 셈 치고 그렇게 쓰면서 좀 더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용] 예나 지금이나 여기서나 저기서나 언제 어디서든[다른 차원 포함] 정말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체] 따라가 상구보리가 끝나서 부처님이나 보살이 되지 않는 한, 굳이 선불교식의 법거량으로 말하자면 “들어온 적도 없는데 나갈 데는 왜 찾는가!”라고 『금강경』 입문자들에게 말해도 될 듯싶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질문도 잘한다. 논쟁을 제일 잘하는 수보리가 나서서 ‘공’에 대한 어려운 공부를 세존께 질문을 척척해 가며 잘도 풀어나간다. 그러나 짜고 치는 고스톱도 타짜라고 할 만한 두 사람의 실력이 어느 정도 대등해야 된다. 장로 수보리 존자의 실력을 낮춰 보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역시 석가세존과는 비교가 안 된다. 따라서 잘하다가도 너무 어렵다기 보다는 안목이나 그릇이 아직 어려서 금방 이해를 하며 따라오지 못하는 수보리를 스승인 세존께서는 1200여명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냥 다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이며 늘 인연에 만족할 줄 아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수보리가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을 때 묻지도 않았는데도 오히려 친절한 추가 설명을 통해서 자비로움을 알리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소통’ 아니 ‘대화’의 명인이며 이 방면에 비교할 바가 없는 초고수이신 세존이라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사진은 2014년 6월 인도 라닥의 한곰파를 찾아 걸어 올라가는 순례자를 찍은 것이다. 산에 올랐으면 하산을 해야하는 것처럼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늘 같은 이야기이다.
사진은 2014년 6월 인도 라닥의 한곰파를 찾아 걸어 올라가는 순례자를 찍은 것이다. 산에 올랐으면 하산을 해야하는 것처럼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늘 같은 이야기이다.

 

그렇다.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식의 대화가 참으로 훌륭한 교육법이지만 애초부터 그런 거래는 긴장감 있게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지금 사람들도 기껏해야 15분 집중할 수 있다는데 당시는 그 더운 날 많은 이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공부하기가 힘들었을까? 이런 측면에서 가끔 『금강경』에 나오는 부차(復次) 즉 ‘또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부차는 수보리의 빠른 답이나 뒤이은 질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 더 설명을 하시거나 질문을 하는 부분을 말한다.

이와 같이 수보리가 머뭇거리거나 이해를 못하는 행동을 할 경우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 해서 수보리가 묻지 않아도 세존께서 자진해서 말씀해 주신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자상하심을 의미하는 언행을 하신다. 따라서 이어지는 앞장의 “보살은 여래가 가르친 바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과 이어져야 하는 것으로 다른 장으로 이해해서 구분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이런 과목을 친 소명태자의 이해부족이 그 원인일 것이다. 그래서 본 새로운 해석에서는 소명태자의 과목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금강경』을 이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편의상 부득이하게 그 이름과 번역만은 소개한 것일 따름이다. 얼마 후 나올 책에는 새로운 구성을 선보일 예정이다.

005 집착없는 보시(4. 묘행무주분 : 妙行無住分)

[원문언해]復次 須菩堤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所謂 不住色布施하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堤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堤야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須菩堤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이니다. 世尊하. 須菩堤야 菩薩이 無住相布施하는 福德도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須菩堤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직역]“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서조차 마땅히 머물러 있으려는 생각이 없어야 보시(布施)로 나아가니, 이른 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행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福德)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그 사이사이인 동남·동북·서남·서북과 그 위·아래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응당히 가르쳐 준대로만 머물지니라.”라고 하셨다.

[새로운 해석]“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보리를 얻는 데[법(法)]에서조차 더 머물러 있으려는 생각을 마땅히 없애고 마음은 늘 보시를 행하려고 해야 한다. [즉 상구보리한 연후에 하화중생해야 한다.] 모든 것은 물의 흐름과 같아서 흐르지 않고 고이면 집착이 되어 썪을 따름이다. 따라서 보리를 얻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늘 중생과 함께 하는 그런 나눔 즉 중생교화라는 보시로 마음과 몸은 나아가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른 바 눈에 보이는 모양이나 색깔 등의 색(色)에 머물지 말고 보시로 나아가야한다. 귀로 듣는 소리인 성(聲)․ 코로 맡는 내음인 향(香)․ 혀로 느끼는 맛인 미(味)․ 만지는 등의 느낌을 알 수 있는 촉(觸)․ 그리고 의식으로 얻는 바의 소산인 법(法)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 마음을 항복시키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늘 중생들을 위해 보시해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해야 보살은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야, 왜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지 그 이유는 아느냐?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福德)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복덕이 있기에 보살이 될 수 있고 계속 보살을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면 알겠느냐?]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아무리 시간을 많이 주고 충분히 생각해 본다고 해도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셀 수 없이 많아서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동쪽 이외의 남쪽·서쪽·북쪽, 그리고 그 사이사이인 동남·동북·서남·서북과 나아가 그 위·아래에 있는 허공을 아무리 시간을 많이 주고 충분히 아니 평생동안 생각해 보라고 해도 네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셀 수 없이 많아서 세다가 다 못세다 죽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하는 공덕의 크기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세어 보려고 해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딴 데 마음[한 눈] 팔지 말고, 마땅히 (여래께서) 가르쳐 준대로만 머물러야 하느니라. ‘즉 어디에도 더 머물러 있으려 하지 말고 늘 보시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로 그 가르침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하셨다. 마땅히 머무른 바가 없어야 하지만 여래의 가르침에 머물러도 된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의심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가르침 자체가 “머물러 있으려 하지 말고 보시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초월적인 법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 수보리는 이 뜻을 알겠느냐! [체상용과 공을 습득하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