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운 원기의 포교활동②

선사의 덕과 계행 흠모한 고종 황제가 자주 물품 보내
그러나 지계 청정히 했던 성품이 이마저 가까이 안 해

석전의 말대로 지계정신이 투철했던 경운은 선암사에 많은 학인이 몰리자 계단을 다시 수립하여 계율을 크게 일으켰다. 예로부터 있었던 계단을 정미년(1907)에 이르러 다시 회복시키기 시작하여 신해년(1911)에 이르기까지 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그 후 어디서든지 선사를 찾아온 수행자들은 선사의 지계정신을 듣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경운은 단순히 경학만을 가르친 스승이 아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도 오직 부지런히 정진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지켜나갔기 때문에 그의 문하생들은 모두 본래부터 의해(義解)가 그대로 계행(戒行)에 부합된 스승으로 여겼다. 이러한 선사의 덕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를 흠모한 고종황제는 자주 물품을 보내주었다. 그렇지만 지계를 청정하게 지녔던 그의 성품은 황제가 보내주신 물품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운의 지계 정신에 대해 비문을 찬한 정인보 역시 높이 평가하였다. 자신은 세상에 계시는 스님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석전 영호인데, 석전은 조계산의 장로 경운 선사야말로 지계와 수행이 참으로 숭고하신 분이고, 모든 경전을 가르쳐서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신 큰스님이라고 말하였다. 계를 받고 61년 동안이나 조심하고 주의하여 지계가 청정하고 행동이 여법하여 수계를 받은 당시 위의(威儀)가 오늘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의연하다. 때문에 수계한 지 일주의 갑자야말로 진실로 경하할 만하고 그 여법한 지계청정이 야말로 진실로 기념할 만하다고 적고 있다.

일찍이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경운선사의 인품을 흠모했던 보정 역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다른 사람의 평이 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윗가 학 물가의 원숭이 영원히 터득 못하니
뉘라서 오늘날에 청정한 안목을 도모하겠는가
깊디깊은 경운화상의 경계 짐작하기 어려우니
백 살 먹은 거북이라야만 헤아릴 수가 있다네
보리수에 꽃을 피워내어 교학법을 전승해주니
진흙의 연못에서는 환선정에 연꽃 피어났다네
머리를 치켜들어 향사루고 조실문에 참문하니
새 소리 가득한 숲속에는 가을 달이 밝았다네.

보정, 「答仙嵒寺擎雲和上」 『茶松詩稿』 권3.

2. 원종과 임제종 활동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오교에 통달하고 그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근대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사는 오래 동안 무종단 형태의 한국불교가 개화기를 맞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원종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한국 근대사회에서 불교계의 종단이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으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불교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계 스스로 도심 속으로 돌아와 포교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세계변화에 주목하고 이를 국가정책에 활용될 수 있도록 선국자적인 인물이 등장하였다. 이런 흐름을 느낀 국가 역시 중요사찰과 관리서를 두어 교단이 정비되고 승직이 제정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전국의 사찰에서는 선원이 복원되어 결사운동이 번성하면서 수행을 통한 자기성찰과 그것을 대중에게로 회향하는 자리이타의 실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세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세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

 

이런 인식변화와 함께 1876년 개항이후 내한한 많은 일본불교의 종파 활동을 지켜본 불교계는 한국불교의 특징과 단합을 과시할 수 있는 모임체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대표 52인은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김현암(金玄庵)을 총무로 추대하였다. 원종의 설립은 무종파의 시대라는 오욕의 역사에서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자각에 의해 불교계의 종단이 부흥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경운 선사 역시 원종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각 부장이 임명될 때 강대련과 함께 서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원종이 설립되면서 임명된 각 부서의 부장은 다음과 같다.

교무부장에 진진응(陳震應), 학무부장에 김보륜(金寶輪), 김지순(金之淳), 서무부장에 김석옹(金石翁), 강대련(姜大蓮), 인사부장에 이회명(李晦明), 김구하(金九河), 감사부장에 박보봉(朴普峰), 나청호(羅晴湖), 재무부장에 서학암(徐鶴庵), 김용곡(金龍谷), 그리고 고등강사(高等講師)에 박한영(朴漢永)이 임명되었다.

서무부장에 임명된 김석옹이 경운 선사이다. 선사는 제강선루(題降仙樓)와 강선루기(降仙樓記) 그리고 석옹차운(石翁次韻)과 석옹칠십구세(石翁七十九歲) 제영(題詠)과 같이 글을 쓰고 자신의 법호를 석옹이라 적고 있다. 또한 경운의 지인들 역시 그렇게 표현하였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21년 1월 발간된 조선불교총보 제22호에 게재된 손우재가 지은 경운선사에 게 바치는 시에 경운을 가리켜 석옹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설립된 원종은 초기에는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특히 불교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의 사찰조직을 정비한 후 지금까지 불교 교육기관으로 유지되어 오던 명진학교를 1910년 4월 불교사범학교로 바꿔 신학문의 요람이 되도록 하였다.

이런 원종이 한국불교의 분열의 주범이 된 것은 종정 이회광이 추진한 일본 종파와의 연합 때문이었다. 이회광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원종과 조동종과의 연합을 체결하려 하였다. 먼저 1907년 일본의 고승 추산묵선(秋山默仙)의 추천으로 ‘권불교재흥서(勸佛敎再興書)’를 쓴 무전범지(武田範之)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회광은 한국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일본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일본의 관민이 고승을 대하는 태도를 보게 하자는 ‘권불교재흥서’의 방향대로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1910년 10월 6일 원종종무원을 대표하여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 관장 석천소동(石川素童)과 만나 7개조로 된 연합문을 만들어 연합을 체결코자 하였다. 이때 체결하고자 하였던 조약문은 다음과 같다.

一. 조선 전체의 원종사원중(圓宗寺院衆)은 조동종과 완전하고 영구히 연합 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종무원에 고문(顧問)을 의촉(依屬)할 것.
一. 조동종종무원은 조선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득함에 간선(斡旋)의 노(勞)를 취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圖)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원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는 조동종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하는 때에는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종무원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나 혹 사원에 숙사를 정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것.
一. 본 체맹(締盟)은 쌍방의 의(意)가 불합(不合)하면 폐지변경(廢止變更) 혹 개정(改正)을 위할 것.
一. 본 체맹은 기관해처(其管轄處)의 승인을 득하는 일로부터 효력을 발생함.

이능화, 『朝鮮佛敎通史』 하권, 신문관 1918, p938

-진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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