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저녁, 잘려나간 달이 뜬다
반 뼘쯤 잘려나간 달이 뜬다
저걸 반달이라 불러야 하나
이지러진 달이라 불러야 하나

더 미지근한 나의 셈법으론
도저히 이름 붙이기 어려워
나는 그냥
달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랬지, 가수가 꿈이었던
청춘이 있었지
반달 같은 청춘이 있었지
나는 그를 이지러진 청춘이라 불렀지

너를 보면
그런 청춘이 생각난다
내가 생각난다

나는 달을 좋아한다. 달 중에서도 반달을 좋아한다. 보름달은 너무 완전체이고, 초승달은 너무 미완성체이다. 그러나 반달은 완전체도 아니고 너무 미완성체도 아니다. 그 중간이다. 불교로는 이것도 중도(中道)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되다 만 달이라고 해야 할까. 되다 만 인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1924년 윤극영 선생은 이 반달을 쪽배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동요를 만들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사춘기 때, 괜히 서러워지는 밤이면, 나는 눈물 글썽이며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아니, 부르면 괜히 눈물이 났다. 내 앳된 삶이 벌써 쪽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지러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극심한 성장통이었으리라. 쟁반 같이 둥근 보름달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속눈썹처럼 예쁜 초승달도 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서쪽 나라를 향해 하염없이 흘러가는 내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 성장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불교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불법(佛法)의 바다를 헤엄치게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내 삶을 한 번도 보름달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초승달의 순진무구를 잃은 지도 오래다. 그냥 쪽배같이 이지러진 반달이다. 어쩌면 내 삶은 반달로 시작해서 반달로 살다가 반달로 끝날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그 반달의 삶이 참 좋다. 그것에 구태여 중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그러면서도 아직은 무엇인가들 더 실을 수 있을 듯한, 그래서 ‘돛대도 삿대로 없이’ 은하수 건너 절로절로 서방정토를 향해 흘러가는 쪽배 같은 반달. 오늘밤은 그 쪽배 위에 나의 ‘그녀'를 실어본다. 나의 ‘관음(觀音)’을 태워본다.

-이벽(시인⦁언론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