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운 원기의 포교활동①

연곡사에서 출가, 선암사로 옮긴 이후 경학에 전념
항상 배우고 그것을 생활에서 익히는 것 즐거워 해

Ⅰ. 서 언

개항으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변화는 불교계를 달라지게 하였다.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화파가 생겨났으며, 개화 의식을 지닌 수행자들은 현실 참여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 하였다.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도심포교가 가능해진 불교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으며, 해인사에서 시작한 경허의 결사운동이 영남과 호남으로 전개되어 수행의 전통을 회복하는데 일조하였다. 국가적으로도 내한활동(來韓活動)이 활발한 일본불교를 견제하고자 대법산을 세우고 관리서(管理署)를 두는 등 그동안 등한시하였던 불교를 제도권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야욕은 일본불교를 통해 한국인들을 포섭하였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사찰령과 같은 통제법령으로 한국불교의 독자적 발전을 방해하였다.

이런 격변기의 한국불교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 경운 원기이다. 그러나 그런 활동과 명성에 비해 세간에 알려진 선사의 활동은 의외로 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운의 법을 이은 제자 금봉 병연이 선사보다도 일찍 입적한 탓에 선사의 行化를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또한 선사가 한 평생 주석한 선암사가 오래 동안 갈등 속에 있어 활동과 사상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탓도 크다.

이제 뜻있는 후손들이 흩어졌던 자료를 찾고, 단편적으로 전해진 활동을 연구하여 선사의 뜻을 실천 선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같은 일이 개인적으로는 선대 스승의 업적을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국불교 전체로 본다면 근대 한국불교의 흐름을 정리하는 일이라 그 가치가 크다.

1852년 경상도 김해에서 출생하여 1936년 선암사에서 입적한 선사의 생애는 한국사회의 근대와 일치한다. 이 시기 한국사회와 한국불교가 격변의 시대를 보낸 것처럼 선사의 생애 역시 변화무쌍하였다. 17세 연곡사에서 출가한 이후 보여준 활동을 보면 모두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헌신이었다. 배불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불교로 도약하려는 종단활동에는 반드시 선사의 참여가 있었다. 근대 최초로 설립된 한국불교 종단인 원종에서는 서무부장으로 참여했으며,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에 반대하여 생겨난 임제종에서는 관장을 맡았다. 서울의 각황사와 순천 환성정에서는 수년간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사의 활동은 외적으로만 빛난 것이 아니었다. 내적으로도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오래 동안 사라졌던 선암사의 계단을 복원하였으며, 올곧은 지계정신으로 설립한 참회계는 많은 동참자들로 하여금 감응을 얻게 하는 등 계율정신에 입각한 수행정진은 일본불교의 활동으로 느슨해진 한국불교의 지계정신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선암사 대승암에서 시작된 후학의 양성은 선사의 문하에 석전 및 진응과 같은 많은 명숙(名宿)들을 비롯하여 근대 한국불교 강원의 강백 가운데 선사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혁혁한 활동에 비해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이 없는 것은 근대불교 연구의 큰 손실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산재한 자료를 모아 우선 선사의 생애와 활동을 개괄적으로 살펴 근대불교 속에 선사의 위상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논문이지만 한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토대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Ⅱ. 수행과 종단활동

1. 수행과 후진양성

경운(1852~1936) 선사의 휘는 원기(元奇)이다. 조선 철종 3년 정월 3일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본관이 김해인 아버지는 김왕근(金王勤)과 어머니는 구(具)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부모 모두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으며, 밑으로 있던 두 아우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고종 5년(1868) 17세가 되던 해 전남 구례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에서 환경(幻鏡) 노사를 은사로 출가한 경운은 해룡(海龍) 노사에게 사미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수행에 전념하게 되었다. 출가는 다소 이른 나이에 했지만 구족계 수지는 늦었다. 33세가 되던 1901년 10월 선암사에서 받았다.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두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석문一多無碍如虛空之千燈,不以無 / 人而 / 不榮.번역하나와 많음이 서로 무애한 것이마치 허공에 천 개의 등을 켰 듯 하지만사람이 없어서야 빛낼 수 있으리오.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경운 원기 대선사의 아홉 폭 화첩 중 두 번째 첩(지허 종정 예하 소장).석문一多無碍如虛空之千燈,不以無 / 人而 / 不榮.번역하나와 많음이 서로 무애한 것이마치 허공에 천 개의 등을 켰 듯 하지만사람이 없어서야 빛낼 수 있으리오.번역=신규탁 연세대 교수

 

출가 후 제방을 유력하면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다녔고 발길 멈추는 곳에 머물렀다. 그러면서도 항상 배우고 그것을 생활에서 익히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런 가운데 경학에 전념하게 된 것은 연곡사에서 출가한 후 환경 노사를 따라 선암사(仙巖寺)로 옮긴 이후이다.

당시 선암사는 불학(佛學)의 중심지였다. 멀리 태고보우(太古 普愚)의 법과 가까이로는 청허휴정(淸虛 休靜)을 계승한 월저도안(月渚 道安)을 비롯하여, 근대에 이르러 법석을 번창시킨 상월새봉(霜月 璽篈), 그리고 순조와 헌종 시대의 침명한성(枕溟 翰醒)과 순창 구암사의 백파긍선(白坡 亘璇) 등이 선암사에 주석했던 조종들이다. 이 가운데 침명 이후 함명태선(函溟 太先)이 법을 이었고, 함명을 이은 경붕익운(景鵬 益運)이 후학을 양성하면서 대승암은 교학의 요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선암사에 온 경운도 대승암 강주였던 경붕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그는 오래지 않아 오교에 통달 하였다. 경운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옛날 스승이었던 환월이 주석하였던 곳에 터를 잡고 더욱더 치열하게 정진하여 환월의 가르침을 계승하게 되면서 화엄종주의 명성을 얻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자신이 교학을 배웠던 대승암의 강주가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1881년에 이르러 경붕 노사가 그만두자 그 뒤를 이은 것이다. 강석을 물려받고 대중의 추대를 받아 교연(敎筵)을 주관한 그는 해박한 가르침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선정과 지혜가 모두 원만하였고, 지계는 완전무결했으며, 배우려고 하는 자가 많아 천고의 법등을 밝힐 수 있었다. 이렇게 대승암에서 후학을 지도한 세월이 40여 년에 이르면서 그의 문하에서 제산의 방장이 되고 좌주가 된 자가 10여 명이 넘을 정도로 교화가 창성하였다.

경운 대사의 가르침은 선암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화엄종주의 명성을 얻은 그는 전국의 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27년에서 1929년 무렵까지 동화사에서 강의하였으며, 1938년 무렵에는 범어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한국 근대불교의 강백으로서 경운대사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영호 및 진응이 뛰어났다. 석전영호는 경운을 찾아 교학을 배우던 때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강호를 찾아다니다가 조계의 대승난야의 문을 두드린 것이 경인년(1890) 중추시절이었다. 승선교(昇仙橋)를 지나 석문(石門)에 올랐을 때는 날이 저물어 종소리도 산에 잠기고 등불이 켜지는 즈음이었다. 그곳은 많은 재사들이 운집하여 초지에 들어가는 기상이 가득하여, 영산법회의 깨침이 지금까지 상주한다는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 그 때 경운선사의 춘추는 마흔을 갓 넘었을 때였지만 소나무를 뒤흔드는 비와 같은 설법으로써 납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번뇌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법석의 동산은 매화나무 가지가 번성하여 그늘이 드넓었으며 영산홍의 나무가 크게 자라서 석양의 그늘을 가릴 정도가 되어 어느 누구도 그 가르침에 견줄 수 없다고 술회하였다.

석전은 함께 수학한 도반 가운데 경운의 법사(法嗣)인 금봉에 대해 높게 평가하였다. 자신보다 12살이나 적었지만 글과 생각이 대단히 빼어나 대중 가운데 으뜸이었다. 경운의 법인을 전승하여 10여 년 동안 불자를 드리워 중생을 제도하였는데 그 법석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와 견주어 볼 때 자신은 그 발자국도 따르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석전은 선암사의 뛰어난 강석 4세를 함명태전 - 경붕익운 - 경운원기 - 금봉병연으로 정리하였고, 그 가운데 경운 선사가 계율에 엄정하고 조계의 종풍을 널리 펼치면서 해동의 불법을 이끌었다고 평하고 있다.

-진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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