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 한국근현대불교의 태동과 경운 원기③

대표적 제자로 영호 ․ 진응 ․ 금봉 ․ 철운 등 꼽혀
당시 불교계 정체성 확립과 중흥에 동고동락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 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도기행을 한다. 선암사를 순례한 최남선은 경운이 “의해(義解)로는 거의 ‘활경장(活經藏)’이 되다시피 하고 또 문식(文識)으로나 인품으로나 모두 일대총림의 목룡(木龍)이라 하겠지만, 우리가 그에게 특수한 경앙(景仰)을 갖는 점은 그보다도 더 그 계행의 고결함에 있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경운은 얽매여서 하는 지계가 아닌 좋아서 하는 정행이었으며, 이 때문에 금강불괴의 알맹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작년에 순천군 선암사와 송광사의 연합 불교포교당에서 선사께서 상주하시면서 설법을 하시어 어둠에 헤매는 중생들을 개발 인도하셨는데, 옮겨 심지도 않은 백련이 못에서 솟아 오르

니 보는 이들이 신기로운 감응에 탄식하며 감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원근에 있는 관리나 신사나 서민들 모두가 (경운)선사가 계신 곳으로 와서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맺어 왕생극락하기를 서원하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중국의 여산 혜원선사가 이 세상에 환생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매일신보, 1915.3.25. 2면.>

인용문은 <매일신보>가 1914년 송광사와 선암사의 연합포교당에서 일어난 이적(異蹟)을 기사화한 것이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조선후기부 터 선교학의 연총이었으며, 1911년에는 민족불교의 상징이었다. 예컨대 임제종의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의 경운을 선출하였는데, 두 절은 1913년 순천의 환선정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경운이 머물며 설법하였다. 그런데 연못에서 심지도 않은 백련이 솟아나니 경운의 불법찬탄에 따른 상서로움이라고 하면서 여산의 혜원처럼 백련결사를 결성한 것이다.

일찍이 『연사고현전(蓮社古賢傳)』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 사령운(謝靈運)이 여산에서 혜원스님을 한번 친견하고는 대를 쌓고 정토경전을 번역하고 연못을 파서 백련을 심었다. 그리고 혜원과 더불어 여러 현인들이 정토왕생의 불도를 닦았다. 이로부터 여산의 백련결사가 천고에 전하는 뛰어난 모범이 되었다. 지금에 그것을 살펴보니 동일한 백련결사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공을 들여서 만든 것과 하늘이 만들어 준 것은 아득히 달라서 더불어 같지 않다. 그리고 물에서 솟아난 기이한 연꽃을 보고서 환희하고 찬탄하는 모습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이처럼 신령스럽게도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조짐이 어찌 사람이 손으로 심은 연꽃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김윤식, 「환선정백련사기」,『산고집』, 218쪽>

백련결사는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행결사다. 중국 동진 때의 고승 혜원이 동림사에서 염불왕생을 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혜원은 처음 123인의 동지와 함께 재회를 베풀고 향과 꽃을 올려 일제히 정업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기약하였으며, 20년 동안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수행하였다고 한다. 백련결사의 구성원이자 「발원문」을 쓴 여규형은 이병휘 · 오재영 · 김효찬 등이 결사 창설의 시말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여규형은 발원문에서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내 마음도 갖가지 반연에 얽매이지 말고 불교의 도제가 되어 원기 선사의 말씀을 따라서 백련결사에 들어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Ⅳ. 경운의 후학과 근대불교

경운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영호 정호(映湖鼎鎬)·진응 혜찬(震應慧燦)·금봉 병연(錦峰秉演), 그리고 철운 종현(鐵雲宗泫)이다. 이들은 경운의 학문을 두루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의 정체성 확립과 중흥에도 동고동락했다.

병연상인은 나와 더불어 스승님의 같은 문하생이었는데, 뛰어난 자태는 대중 가운데 으뜸이었고 문장과 사고는 대단히 빼어났으니, 이 분은 스승님의 제자로서 후에 호를 금봉이라 하

였다. 금봉 법형은 나이가 나보다 1살 많았지만, 스승님의 법통을 친히 전승하여 10여 년 동안 교편을 잡고 중생을 제도하였는데 그 법석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나는 그의 발자국도 따르지 못하였다. 금봉은 영구산을 떠나 북쪽지방으로 만행을 하였는데, 옛 도반들과 이마를 맞대고 토론했던 비오는 날 밤의 일화 역시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금봉 법형은 나이 겨우 48세에 그가 배운 바를 펼치지도 못한 채 갑자기 먼저 입적하고 말았다. <정호, 「조계산경운당대사비기음」, 『산고집』, 61~62쪽>

영호 정호가 찬한 스승 경운의 비문에 수록된 금봉 병연(1869~1916)에 관한 내용이다. 금봉은 속명이 장기림(張基林)이다. 그는 15세에 출가하기 전 『사기』와 경서 등을 두루 통달하여 한유·유종원·구양수·소동파와 같은 중국의 문장가들과 비견되기도 하였다. 출가한 후 10여 년 동안 화엄사·대흥사 등 강학으로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며 경학을 연찬했는데, 화엄사의 원화(圓化), 대흥사의 범해(梵海)·원응(圓應), 그리고 경운의 문하에서 화엄·법화·전등염송 등을 폭넓게 공부했다.

경운 원기 선사가 비로암에서 6년간 사경한 『대방광불화엄경』80권.(선암사 성보박물관)
경운 원기 선사가 비로암에서 6년간 사경한 『대방광불화엄경』80권.(선암사 성보박물관)

 

1898년에는 경운의 강맥을 이어받아 선암사 대승암에서 후학을 제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봉은 혼란과 격변을 거듭했던 시기였던 만큼 불교계의 앞날을 걱정했다. 후학들에게도 내전뿐만 아니라 근대문물에 대한 수용 역시도 강조하였다. 이후 그는 스승 경운과 영호 정호·진응 혜찬 등과 함께 임제종 설립과 불교진흥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경운을 비롯한 후학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중흥이었다. 인재양성은 그들의 화두였던 만큼 강학과 포교를 통해 오랜 탄압과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의 죽음에 스승 경운도 비통해했고, 박한영 역시 불교학림의 추도식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철운 조종현(鐵雲 趙宗泫, 1906~1989)은 경운 원기의 손제자이다. 그는 1906년 태어나 16세 되던 1922년 선암사로 출가하였다. 아들 조정래의 회고에 의하면 조종현은 수행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닌 신식공부를 위해 출가하였다고 한다. 법호는 철운, 법명은 종현이다. 범어사·동화 사·통도사 강원에서 영호 정호·진응 혜찬 등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했는데, 24세인 1930년에는 강사가 되었다. 『산고집』은 경운이 1926~1928년까지 조종현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우선 경운은 “금정산 하나가 오랫동안 눈 속에 있었는데 그대도 내 눈 속에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니 어찌 일찍이 잊을 수 있겠느냐.”고 했을 정도로 조종현을 아꼈다. 특히 경운은 조종현에게 화엄 현담, 삼현, 십지에 대한 공부법을 당부했다.

너는 이미 근면하게 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이름난 강석에 참가하여 유학하는 날이 많으니 비록 많은 곳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보고 들은 것이 씨앗이 될 것이니, 도리어 나보다 낫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끝을 잘 맺지 못한다.’는 평을 얻는다면 영산의 오천 퇴석(退席)이 또한 어찌 말세에 깊은 경계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매번 사람이 없어 조용할 때 다시 그것을 생각하거라. 때때로 향등을 점화하지도 않고 어둠속에서 호법선신에게 절을 하며 끝내 불법의 문중에서 물러나지 않고, 법기를 성취하여 아뇩보리의 소원을 짊어지고 뜻을 새겨 진실로 빈다면 이에 조그마한 성취의 단서가 나보다 나을 것이다. 너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경운, 「손상좌 조종현의 동화사 강원 입학에 부쳐」, 『산고집』, 91쪽>

경운은 손상좌의 탁월한 재주와 근면성실, 제방에서 수학한 결실은 스승인 자신보다도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손상좌가 단순한 교학만의 기교로 수행의 완성이 이루어졌음을 자만하지 않기를 바랐다. 호법선신에게 절을 하며 끝내 불법문중에서 물러나지 않고 가장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끊임없이 그 뜻을 새기기를 바란 것이다. 한편 조종현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불교개혁운동·불교 대중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에 교육제도혁신위원, 연맹규약제정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그는 개운사 강원의 영호 정호 회상에서 경학연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1930년대부터는 만해 한용운에 영향을 받아 조국독립을 목표로 설립된 만당(卍黨)에 가입하였다. 한용운은 임제종 설립 당시 관장에 임명된 경운을 대신하여 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1년부터 33년까지는 한용운이 편집·발간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불교』 지에 매월 시와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종현의 현실 참여는 금봉 병연, 그리고 영호 정호·진응 혜찬 등 경운을 중심으로 한 선학들의 한국불교정체성 확립과 중흥을 위한 활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